빛바랜 맹세의 끝에서

GoodNovel 완결

서은채는 강태준 몰래, 그의 내연녀를 해외로 빼돌렸다. 그날 밤 강태준은 서은채의 부모를 납치했다. 두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내연녀의 행방을 캐내려는 속셈이었다. 강태준이 휴대전화 화면을 서은채 앞으로 들이밀었다. 화면 속, 서은채의 부모는 의자에 꽁꽁 묶여 있었다. 가슴팍에는 시한폭탄이 매달려 있었고 카운트다운 숫자가 쉴 새 없이 줄어들고 있었다.

챕터 (1)

第1章

서은채는 강태준 몰래, 그의 내연녀를 해외로 빼돌렸다. 그날 밤 강태준은 서은채의 부모를 납치했다. 두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내연녀의 행방을 캐내려는 속셈이었다. 강태준이 휴대전화 화면을 서은채 앞으로 들이밀었다. 화면 속, 서은채의 부모는 의자에 꽁꽁 묶여 있었다. 가슴팍에는 시한폭탄이 매달려 있었고 카운트다운 숫자가 쉴 새 없이 줄어들고 있었다. 제1화 00:59:59 00:59:58 강태준은 서은채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흐트러진 곳 하나 없이 정장을 차려입고, 긴 손가락으로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리는 모습은 마치 별것 아닌 계약서에 서명받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태연했다. “서은채, 이제 59분 남았어.” 목소리는 차분했다. 다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해. 소희를 어디로 보냈어?” 서은채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 갔다. 누군가 목을 틀어쥔 듯 숨이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같은 질문을 들은 건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처음 이소희의 행방을 물었을 때는 침묵했다. 그러자 강태준은 턱을 붙잡고 엄지로 입술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달래듯 물었다. “서은채, 이제 그만 고집부려.” 그리고 세 번째로 그 이름을 들은 지금, 강태준은 장모님과 장인어른의 목숨을 담보로 아내에게 대답을 강요하고 있었다. “강태준...” 서은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당신한테는 장모님, 장인어른이고 나한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야...” 강태준의 입에서 서늘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서은채를 향한 눈빛은 섬뜩할 만큼 차가웠다. “그래? 나 몰래 빼돌리기 전에 소희도 나한테 그만큼 소중한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어?” 강태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서은채는 헛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소중한 사람?’ 강태준은 분명 밖에서 만나는 여자들은 그저 잠깐 즐기는 상대일 뿐, 싫증 나면 언제든 버릴 수 있다고 말했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는 오직 나뿐이라고도 했었지.’ 그런데 지금 강태준은 고작 이소희 때문에 서은채 부모님의 목숨을 담보로 그녀를 협박하고 있었다. “강태준, 내가 끝까지 말하지 않으면 어떡할 건데... 정말 우리 부모님을 죽이기라도 할 거야?” 서은채는 잠긴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직접 확인해 봐.” 상체를 살짝 기울인 강태준은 핏기 없이 창백해진 서은채의 얼굴을 무심히 바라봤다. 서은채는 온몸을 떨며 끝내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테이블 위로 뚝뚝 떨어졌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강태준은 분명 누구보다 진심으로 서은채를 사랑했던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서은채는 평범한 집안의 딸이었지만, 강태준은 제경에서도 손꼽히는 재벌가의 후계자였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가진 남자였다. 그래서인지 자존심이 강하고 오만했으며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었다. 그런 강태준이 서은채에게 첫눈에 반했다. 강태준의 구애는 제경 사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무려 아흔아홉 번이나 고백했고, 그때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큰 화제가 되었다. 서은채가 지나가듯 좋아한다고 말한 화가의 그림을 통째로 사들여 방 하나를 가득 채우기도 했고, 생일에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호텔 스위트룸 창밖에서 오직 그녀만을 위한 불꽃 쇼를 펼치기도 했다. 강태준의 끈질긴 구애에 결국 서은채는 마음을 열었지만, 서은채의 부모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재벌가의 결혼 생활이 어떤 것인지, 서은채의 부모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내를 집에 두고 밖에서는 다른 여자를 만나는 일이 흔한 세상에서, 권력과 돈을 가진 재벌 2세의 사랑을 마냥 동화처럼 믿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서은채의 부모는 딸을 집안 형편이 비슷한 남자와 결혼시키려 했다. 하지만 강태준은 서은채의 집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꼬박 하루를 버텼다. 평생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여 본 적 없던 강태준은 자존심까지 내려놓고 서은채와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결국 서은채의 부모는 그의 진심에 마음이 흔들렸고, 끝내 완강하던 반대를 거두었다. 결혼한 뒤에도 강태준은 서은채를 끔찍하게 아꼈고, 무슨 일이든 그녀에게 맞춰 주었다. 서은채가 생리통으로 힘들어하던 날에는 해외에 있다가도 밤새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 직접 찜질팩을 데워 배에 올려 줄 정도였다. 무심코 서문에서 파는 마들렌이 먹고 싶다고 하면 몇 시간을 운전해서라도 사 왔다. 서은채는 좋은 사람과 결혼했다고 믿었다. 처음으로 ‘이소희’라는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처음에는 비서에게서 우연히 들은 이름이었다. 강태준이 강연하던 자리에서 어떤 여대생이 일부러 넘어져 그에게 접근하려 했다는 이야기였다. 서은채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수법이라며 그냥 웃어넘겼다. 강태준에게 접근하려는 여자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는 결혼한 뒤 단 한 번도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린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두 번째로 그 이름을 들었을 때는 당황스러웠다. 침대 위에서 강태준은 서은채를 품에 안은 채 사랑을 나누던 중, 나지막이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소희야...” 순간 서은채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따져 묻자, 강태준은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해명했다. 이소희에게 마음이 간 건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밖에서 잠깐 만나다 끝낼 여자일 뿐이라고 했다. “이쪽 세계에서는 다들 그렇게 살아. 은채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너야. 그건 평생 변하지 않아.”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강태준의 행동은 점점 더 대담해졌다. 값비싼 보석과 고급 주택을 사 주는 것도 모자라, 사적인 모임에까지 이소희를 데리고 다녔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제경 전체로 퍼졌다. 서은채는 울면서 따져 보기도, 화를 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강태준은 더 이상 예전처럼 그녀를 달래지 않았다. 대신 차갑게 한마디만 내뱉었다. “억지 좀 그만 부려.” 결국 참다못한 서은채는 이소희를 해외로 내보냈다. 강태준이 이토록 극단적으로 나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이소희의 행방을 알아내겠다는 이유 하나로 서은채의 부모를 납치해 몸에 폭탄까지 설치했다. “스위스에 있어.” 서은채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취리히에 있는 내 명의 별장으로 보냈어.” 강태준은 몇 초간 서은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진위를 가늠하더니, 곧바로 휴대전화를 들어 전화를 걸었다. 사실임을 확인한 그는 곧장 재킷을 집어 들고 서둘러 이소희를 데리러 나가려 했다. “우리 부모님은?” 서은채가 다급히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말하면 풀어 준다고 했잖아!” 강태준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눈빛에는 아무런 온기도 없었다. “남문로 폐공장. 가서 직접 찾아.” 서은채는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쳐나가 차를 몰고 곧장 남문로로 향했다. 겨우 부모님을 찾아냈을 때, 폭발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10분이었다. 의자에 단단히 묶인 부모님의 입에는 테이프까지 붙어 있었다. 서은채를 발견한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서 도망치라는 뜻이었다. 서은채는 곧장 달려가 떨리는 손으로 끈을 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폭탄의 타이머는 초 단위로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전자음이 죽음을 재촉하듯 귓가를 파고들었다. 00:03:21 00:03:20 아무리 애를 써도 끈은 풀리지 않았다. 다급해진 서은채의 눈에서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 서은채의 아버지 서동만이 온 힘을 다해 서은채를 밀쳤다. 충격에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순간, 서동만은 그대로 폭탄 위로 몸을 던졌다. “아빠!” 귀를 찢는 폭발음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서은채를 집어삼켰다. 서은채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눈앞은 순식간에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서은채는 병원에 누워 있었다. 서은채의 부모님은 모두 크게 다쳤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진 상태였다. 서은채는 병상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쏟으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제가 사람을 잘못 봤어요...” 서은채의 어머니 윤정희가 힘겹게 손을 들어 서은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다시 시작하면 돼.” 서은채는 고개를 저었다. “강태준이 쉽게 놔주지 않을 거예요.” 이소희의 존재를 알았을 때, 서은채도 이혼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은채가 이혼 합의서를 내밀 때마다 강태준은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강태준은 이소희와의 관계는 그저 잠깐 즐기는 것뿐이고 싫증이 나면 알아서 정리할 거라며,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는 서은채뿐이니 절대로 이혼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때 서동만이 서은채의 손을 꼭 잡았다. “아니야, 은채야. 네가 모르는 일이 하나 있어. 강태준도 아마 까맣게 잊고 있을 거다. 결혼을 허락했던 날 밤, 나랑 네 엄마가 강태준에게 혼전 계약서 한 장을 받아 뒀어.” 서은채가 놀란 눈으로 서동만을 바라보았다. “강태준이 너를 배신하는 순간...” 서동만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계약은 효력이 생겨. 그러면 강태준의 동의 없이도 이혼할 수 있어. 이혼하고 나면 우리 가족은... 다시는 강태준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는 거야.” 서은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물만 하염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부모님은 오래전부터 혹시 모를 날을 대비해 서은채가 빠져나갈 길을 마련해 두었던 것이었다. ... 다음 날, 서은채는 두 가지 일을 처리했다. 먼저 부모님과 함께 강태준이 서명한 혼전 계약서를 들고 법률사무소를 찾아갔다. 변호사는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공증까지 받으셨으니, 법적으로 효력이 있는 계약서입니다. 이대로 절차를 밟으면 이혼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 서은채는 부모님과 함께 신분 말소 절차를 밟았다. ‘모든 절차가 끝나면 세상 어디에도 더 이상 나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게 돼. 그리고 강태준은 평생 나를 찾을 수 없을 거야.’ 제2화 신분 말소 절차를 마치려면 보름이 걸린다는 말을 들은 서은채는 서동만, 윤정희와 상의한 끝에 일단 강씨 가문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앞으로 보름 동안은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강태준의 곁에 머물며 조금의 낌새도 내비쳐서는 안 됐다. 강태준이 눈치채는 순간, 서은채 가족 세 사람 중 누구도 무사히 떠날 수 없었다. 강태준은 그럴 만한 능력과 수단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강씨 가문 저택으로 돌아온 서은채는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때 보물처럼 아꼈던 두 사람의 사진부터 강태준이 써 준 연애편지, 함께 여행을 다니며 하나씩 사 모았던 기념품까지, 서은채는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모조리 벽난로 속으로 던졌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지난날의 흔적을 하나씩 집어삼켰다. 마치 한때 진짜라고 굳게 믿었던 우스운 꿈에서 이제야 깨어난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서은채는 저택 뒤뜰로 향했다. 뒤뜰에는 소나무가 빼곡했다. 그중에는 강태준이 서은채를 위해 직접 심은 어린 소나무도 있었다. 강태준은 소나무가 변치 않는 절개를 상징한다며, 자신의 사랑도 이 나무처럼 영원히 시들지 않을 거라고 말했었다. 서은채는 도끼를 집어 들고 강태준이 직접 심었던 그 나무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도끼를 들어 나무를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팔이 저려 와도 멈추지 않았다. 도우미들은 멀찍이 떨어져 바라볼 뿐 감히 다가와 말리지 못했다. 도끼날이 나무를 파고들 때마다 둔탁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뒤뜰에 울려 퍼졌다. 서은채는 오랫동안 놓지 못했던 미련마저 한 조각씩 잘려 나가는 것 같다고 느꼈다. 셋째 날, 서은채는 산 정상에 있는 사랑바위를 찾아갔다. 그곳에는 서은채와 강태준의 이름이 새겨진 자물쇠 하나가 걸려 있었다. 예전에 강태준은 서은채를 품에 안은 채 열쇠를 절벽 아래로 던지며, 이제 두 사람은 평생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말했다. 서은채는 펜치를 꺼내 자물쇠를 망설임 없이 잘라 버렸다. 끊어진 자물쇠가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서은채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저택으로 돌아오니, 거실에 불청객 두 명이 있었다. 강태준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이소희는 강태준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연약한 모습이었다. 서은채는 두 사람을 본체만체 지나쳐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거기 서.” 뒤에서 강태준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은채는 걸음을 멈췄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내가 왜 소희를 여기까지 데려왔는지 알아?” “글쎄.” “네 손에 쫓겨나듯 해외로 보내진 바람에 소희는 물갈이까지 하며 며칠을 고생했어.” 강태준은 책망 섞인 시선으로 서은채를 바라봤다. “서은채, 소희한테 사과해.” 그제야 서은채가 몸을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소희는 겁먹은 사람처럼 강태준의 소매를 조심스레 붙잡고 있었지만, 서은채와 눈이 마주친 순간 눈가에 회심의 미소가 언뜻 스쳤다. “그렇게 못 하겠다면?” 서은채가 담담하게 물었다. “됐어, 태준 씨. 나는 괜찮아...” 이소희가 한없이 여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섭섭한 건 내가 참으면 되지, 뭐. 어쨌든... 언니가 이 집 안주인인걸.” 강태준이 곧바로 이소희를 품 안으로 더 끌어당겼다. “그렇게까지 참을 필요 없다니까.” 그리고 이소희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앞으로는 내가 지켜줄 테니, 하고 싶은 대로 해.” 서은채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 눈앞의 광경이 너무 우스워서 가소롭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때 도우미가 이소희를 위해 준비했다며 따뜻한 차 한 잔을 가져왔다. 마침 강태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강태준이 이소희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 얘기만 하면 머리 아프다고 했잖아. 나가서 받고 올 테니까 차 마시고 있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서은채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명치를 세게 얻어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 강태준은 사업 기밀이 새어 나갈 수 있다는 이유로 집 밖에서는 절대 업무 이야기를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소희 하나 때문에 오랫동안 지켜 온 원칙마저 아무렇지 않게 바꾼 듯 보였다. 강태준이 잠시 밖으로 나간 뒤, 거실에는 서은채와 이소희만 남았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이소희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가련한 기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서은채를 도발했다. “봤지?” 이소희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강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지위 하나 믿고 날 쫓아낸 거야? 결국 태준 씨가 직접 찾아내서 이렇게 다시 데려왔잖아. 태준 씨 몸도 마음도, 이미 다 나한테 있어!” 서은채는 아무런 동요 없이 이소희를 바라보았다. “갖고 싶으면 가져.” 이소희는 순간 말문이 막힌 듯 굳었다가 이내 발끈했다. “네가 주고말고 할 게 아니거든? 어차피 태준 씨는 결국 내 남자가 될 거야. 네가 차지하고 있는 강씨 가문 안주인 자리도 결국 내 것이 될 거고!” 하지만 서은채가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이소희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때 밖에서 강태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이소희는 눈빛이 돌변하더니, 테이블 위 뜨거운 차를 집어 들어 그대로 제 몸에 쏟아부었다. “으악!” 날카로운 비명과 동시에 이소희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강태준이 급히 거실로 들어왔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온몸이 뜨거운 차에 젖은 채 서럽게 울고 있는 이소희였다. “서은채!” 강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얼굴에는 분노가 드러나 있었다. “사과하기 싫으면 하지 마. 그렇다고 소희한테 이런 짓까지 해?”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못 믿겠으면 CCTV 확인해.” “그래. 확인하지.” 강태준도 단호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이소희가 곧바로 강태준의 팔을 붙잡으며 울먹였다. “태준 씨, 언니 잘못 아니야... 내가 괜히 태준 씨 곁에 있고 싶다고 욕심부린 게 잘못이지. 그냥 내가 다시 떠날게...” 이소희가 막 걸음을 떼려는 순간, 강태준이 그녀의 팔을 붙잡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널 찾아왔는데 또 내 눈앞에서 사라지겠다고? 나 죽는 꼴 보고 싶어?” 강태준은 마치 어렵게 되찾은 보물을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이소희를 품에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러다 서은채를 바라보는 순간, 눈빛이 섬뜩할 정도로 차갑게 변했다. “이 일은 그냥 넘기지 않을 거야.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결국 서은채는 지하실에 갇혔다. 경호원들이 양팔을 붙잡아 지하실 안으로 밀어 넣으려 하자, 서은채는 필사적으로 버티며 소리쳤다. “강태준! CCTV 확인해! 내가 한 짓 아니라고!” 하지만 강태준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갑게 내뱉었다. “확인할 필요 없어. 난 소희 말만 믿어.” 육중한 문이 닫히자, 칠흑 같은 어둠과 살을 에는 냉기가 순식간에 서은채를 덮쳤다. 서은채는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추위에 떨었다. 하지만 몸을 에워싼 냉기보다 가슴을 짓누르는 절망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언제가 됐든 가장 사랑하는 여자는 나일 거라고 맹세하더니...’ 끝내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서은채는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탔다. 결혼한 뒤 강태준은 추위를 많이 타는 서은채를 위해 거액을 들여 저택 전체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설비를 마련했고 야외 정원까지 사계절 내내 따뜻하게 유지되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겨울이면 차갑게 식은 서은채의 손발을 품에 끌어안아 직접 녹여 주곤 했다. “평생 이렇게 내가 따뜻하게 해 줄게.” 이제 와 돌이켜 보니,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 맹세도 입 밖으로 내뱉던 순간에만 진심이었던 모양이었다. 제3화 다음 날, 서은채가 추위에 시달리다가 거의 정신을 잃어 갈 무렵에야 지하실 문이 열렸다. 경호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문 앞에 서서 말했다. “대표님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요.” 서은채는 벽을 짚은 채 비틀거리며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고 이가 딱딱 맞부딪칠 정도로 추위가 가시지 않았다. ‘다음은 없어.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강태준을 내 인생에서 영원히 지워 버릴 수 있을 테니까.’ 그날 저녁, 강태준의 비서 장현호가 드레스와 보석을 가져왔다. 그리고 자선 경매 만찬에 부부 동반으로 참석하라는 강태준의 뜻도 함께 전했다. 서은채는 예정대로 만찬에 참석했다. 그런데 연회장 입구에 도착하자 이소희가 눈에 들어왔다. 이소희는 유명 디자이너의 최신 컬렉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목에는 강태준이 지난달 경매에서 10억 원이 넘는 금액에 낙찰받은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서은채는 걸음을 멈추고 강태준을 바라보았다. “소희 씨도 왔는데 굳이 나까지 부른 이유가 뭐야?” 강태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원래 소희를 데려올 생각은 없었어. 이런 자리에 와 본 적이 없다며 구경하고 싶다기에 데려온 거야.” 강태준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은채야, 너무 속 좁게 굴지 마.” 서은채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속이 좁아서가 아니었다. 강태준은 법적인 아내와 내연녀를 한자리에 데려오고도, 서은채가 어떤 시선을 받고 얼마나 많은 사람의 입방아에 오를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강태준은 그대로 이소희와 함께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소희는 강태준의 팔에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주변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 대표 부부는 금슬이 정말 좋은가 봐. 두 사람 잘 어울린다.” “사람 잘못 봤어. 저쪽에 있는 분이 강 대표 부인이야. 옆에 붙어 있는 여자는... 내연녀고.”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이 당황한 얼굴로 서은채를 흘끗 바라보더니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강 대표가 저 여자한테 입힌 건 이번 시즌 신상이잖아. 사모님이 입은 건 유행 지난 드레스고... 저러니 헷갈릴 수밖에.” 서은채는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잠시 후 경매가 시작되자 서은채는 마음에 드는 물건 몇 점에 가볍게 패들을 들었다. 그런데 어떤 물건이든 서은채가 응찰하기만 하면 이소희는 어김없이 그보다 100만 원을 더 얹었다. 주변에서 비웃음 섞인 수군거림이 흘러나왔다. “본처가 내연녀한테 저렇게 대놓고 농락당하는 건 처음 보네...” 서은채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패들을 든 손을 내리지 않았다. 얼마까지 올라가든 끝까지 응찰하겠다는 뜻이었다. 순식간에 가격이 치솟자 이소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곧바로 강태준의 소매를 붙잡고 애처롭게 말했다. “태준 씨, 저 정말 저거 갖고 싶어요...” 강태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서은채를 바라보았다. “은채야, 소희한테 양보해.” “싫어.” 서은채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소희 씨가 가진 돈으로 끝까지 낙찰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할 수 있어. 난 당신의 법적인 아내고, 당신 재산은 곧 부부 공동재산이기도 하니까.” 서은채는 이소희에게 시선을 돌리며 비웃듯 덧붙였다. “당신이 아무리 많이 퍼 줘도 소희 씨는 나와 같은 위치에 설 수 없어.”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이소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 이소희는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맞아요. 강씨 가문 사모님은 언니죠... 저는 떳떳하게 나설 수도 없는 내연녀일 뿐인데 괜한 욕심을 부렸나 봐요. 태준 씨... 우리 이제 그만 만나요!” 말을 마친 이소희는 몸을 돌려 연회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강태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강태준은 서은채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뼈가 으스러질 듯 강한 힘에 손목이 욱신거렸다. “내가 좀 만나다 보면 알아서 싫증 날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기어이 소희를 내 곁에서 쫓아내야겠어?” 서은채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강태준을 바라보았다. “쫓아냈다고? 내가?” 강태준은 싸늘하게 얼굴을 굳힌 채 서은채의 손목을 내팽개치듯 놓고 이소희를 따라 연회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서은채는 홀로 그 자리에 남았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에는 조롱도 있었고 동정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서은채는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날 테니까.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서은채는 휴대전화에 뜬 알림을 보고 잠에서 화들짝 깨어났다. [충격! 티에스 그룹 대표이사 아내의 노출 사진 999장, 하틀리 경매에 출품돼 파문!] 순간 서은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 사진들은 강태준만 가지고 있을 텐데...’ 제4화 서은채는 떨리는 손으로 강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이 잠겨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사진... 당신이 공개한 거야?” 전화기 너머로 강태준의 차가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경매에는 꽤 소질이 있던데? 상한선도 없이 가격을 올려 대는 게 그렇게 재미있었어? 그 사진들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는 꼴을 보기 싫으면...” 강태준의 목소리가 잔인하게 가라앉았다. “지금 당장 경매장으로 가. 한 장도 빠짐없이 네 손으로 직접 낙찰받아.” 그때 전화기 너머로 이소희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렸다. “태준 씨... 언니한테서 전화 온 거야? 그냥 내가 떠날게. 내가 괜히 곁에 있어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이소희에게 대답하는 순간, 강태준의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부드러워졌다. 곧이어 전화기 너머로 두 사람이 입을 맞추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또 떠난다고 하기만 해 봐!” 어느 순간 전화는 끊겨 있었다. 서은채는 차가운 호수에 빠진 듯 온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하지만 지체할 수 없었다. 서은채는 곧바로 경매장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객석은 남자들로 가득했고, 정면의 대형 스크린에는 서은채의 지극히 사적인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곤히 잠든 서은채의 민낯을 찍은 사진도 있었다. 당시 강태준은 자는 모습이 귀엽다며 굳이 사진으로 남겨 두었다. 샤워를 마친 뒤, 수건 하나만 두른 채 돌아선 뒷모습을 찍은 사진도 있었다. 강태준은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 보고 싶다며 서은채를 달래 사진을 찍었다. 침대 위에서 찍은 은밀한 사진도 있었다. 그때 강태준은 관계를 한 뒤 서은채의 몸에 남은 흔적들을 사랑의 증거라고 말했다. 이제 그 모든 사진이 수많은 낯선 사람 앞에 전시되어 있었다. 경매장에 모인 남자들의 시선이 서은채의 몸을 훑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말들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몸매가 저 정도였어? 강 대표는 복도 많네.” “예전에 강 대표가 아내를 그렇게 끔찍이 아꼈다던데, 어떻게 아내의 사생활이 담긴 사진을 경매에 내놓을 수가 있지?” “싫증 났겠지. 재벌가 사모님이라고 겉으로는 화려해 보여도 뒤에서는 어떻게 사는지 누가 알아.” 한마디 한마디가 서은채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문득 예전의 강태준이 떠올랐다. 강태준은 한때 서은채에게 지나칠 정도로 강한 집착을 보였다. 예전에 섬으로 휴가를 갔을 때, 서은채가 등이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었다는 이유로 다른 남자가 몇 번 쳐다보자 곧장 호텔로 데려가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다는 듯 집요하게 확인했다. “서은채는 내 거야.” 다른 남자가 쳐다보는 것조차 견디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여자의 기분을 풀어 주겠다는 이유로, 강태준이 직접 이런 비상식적인 경매까지 기획했다. 서은채의 가장 은밀한 사진들이 수많은 남자의 구경거리로 내던져지고 있었다. 서은채는 사진이 화면에 올라올 때마다 끝까지 패들을 들었다. 사진을 한 장씩 낙찰받을수록 강태준을 향한 미련은 빠르게 식어갔다. 마지막 사진까지 손에 넣었을 때, 강태준을 향해 남아 있던 마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경매장을 빠져나오자,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부 낙찰받은 걸로 만족해?” 강태준의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비아냥이 묻어 있었다. 서은채는 휴대전화를 꽉 움켜쥐었다.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내가 이혼하자고 할까 봐 무섭지도 않아?” 강태준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상대하듯 무시하는 말투로 대답했다. “넌 나랑 이혼 못 해, 은채야. 내가 서명하지 않는 이상 넌 절대 이혼할 수 없어.” 서은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태준은 역시나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서은채의 손에는 이미 오래전 강태준이 직접 서명한 혼전 계약서가 있다는 것을. 서은채가 대답하지 않자, 강태준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오늘 일은 그냥 경고라고 생각해.” 강태준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소희만 건드리지 않으면 알아서 정리하고 가정으로 돌아갈 거라고. 며칠 뒤면 네 생일이니까 그때 파티 열어 줄게. 오늘 일은 그걸로 풀어.” 서은채가 필요 없다고 말하려는 순간, 강태준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날 이후 서은채의 SNS에는 거의 매일 이소희의 새로운 게시물이 올라왔다. 가장 최근에 올라온 게시물에는 요트 위에서 이소희를 품에 안은 강태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더니 섬을 사 줬다.] 화면을 아래로 내리자 다른 게시물도 줄줄이 나타났다. [고양이 털 알레르기가 있는데도 나 때문에 랙돌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했다.] [휴대전화 사진첩이 온통 내 사진뿐이네.] 예전의 서은채였다면 게시물 하나를 볼 때마다 숨이 막힐 만큼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최근 강태준은 줄곧 이소희의 집에서 지냈다. 가끔 본가로 돌아오는 날도 있었지만, 집 안에서 물건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대로 서은채가 사라진다고 해도 강태준은 한동안 알아차리지 못할지도 몰랐다. 제5화 생일 파티 당일, 강태준은 직접 차를 몰고 서은채를 데리러 왔다. 차 안에는 강태준 혼자였다. “오늘은 소희 씨 안 데려왔네?” 서은채가 무심하게 묻자, 강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앞으로는 웬만하면 둘이 마주칠 일 없게 할 거야. 그래야 괜히 네 심기를 건드리는 일도 없겠지.” 서은채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 ‘내 심기를 건드릴까 봐서가 아니라, 내가 또 이소희를 괴롭힐까 봐 걱정되는 거겠지.’ 어느새 강태준에게 서은채는 이소희를 못살게 구는 악독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생일 파티는 성대하게 열렸다. 강태준은 파티 내내 서은채의 손을 잡고 다니며 값비싼 보석은 물론 유명 화가의 작품까지 선물했다. 그러고는 서은채의 눈치를 살피며 나지막이 물었다. “이 정도면 이제 화 풀렸지?” 서은채는 강태준을 바라보다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 예전에도 강태준은 서은채를 화나게 할 때마다 자존심을 굽히고 이렇게 달래 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서은채는 결국 마음이 약해져 강태준을 용서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강태준은 장인과 장모의 목숨을 빌미로 서은채를 협박했다. 게다가 서은채의 자존심을 짓밟고, 가장 은밀한 사진까지 수많은 사람 앞에 경매로 내놓았다. 이제 강태준이 세상 모든 것을 가져다 바친다고 해도 되돌릴 수 없었다. 서은채가 입을 열려던 순간, 갑자기 연회장 문이 열렸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이소희가 문 앞에 잔뜩 주눅 든 얼굴로 서 있었다. 순간, 강태준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이소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눈시울을 붉혔다. “나도... 언니 생일 축하해 주고 싶어서 왔어. 선물도 준비했어...” “난 소희 씨가 보고 싶지 않은데.” 서은채가 싸늘하게 잘라 말했다. 하지만 강태준은 이미 직원을 불러 이소희의 자리를 따로 마련하게 한 뒤, 서은채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축하해 주겠다고 여기까지 왔잖아. 지난번 일은 이쯤에서 풀어.” 정작 서은채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였지만, 강태준의 시선은 온종일 이소희를 향해 있었다. 밴드의 연주가 시작되고 춤을 출 시간이 되자 강태준은 먼저 서은채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한쪽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이소희를 발견하자 결국 서은채의 손을 놓고 이소희에게 다가갔다. 서은채는 홀로 구석에 서서 서로를 끌어안고 춤추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춤이 끝난 뒤, 이소희가 하이힐 때문에 발이 아프다며 칭얼거리자, 강태준은 직접 편한 신발을 사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강태준이 사라지자, 이소희는 기다렸다는 듯 서은채에게 다가와 휴대전화를 흔들어 보였다. “서은채, 넌 아마 모르지? 태준 씨가 오늘 너한테 준 선물, 전부 내가 싫다고 한 것들이야. 네 생일 파티에 오는 것도 나한테 허락받다시피 했고, 여기 있는 동안에도 분 단위로 나한테 연락하고 있었어.” 이소희는 보란 듯이 두 사람이 주고받은 메시지를 서은채 앞으로 내밀었다. “봐. ‘자기야, 조금만 참아. 금방 돌아가서 같이 있어 줄게.’ 이렇게 보냈잖아.” 이미 마음이 완전히 식어 버린 서은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네 자리.” “조금만 기다려.” 서은채는 담담하게 이소희를 바라봤다. “곧 비워 줄 테니까.” 이소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서은채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서은채는 이소희가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소희는 예상치 못한 돌발 행동을 보였다. 갑자기 서은채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잡아당겨 자기 뺨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있는 힘껏 후려쳤다. 날카로운 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마침 돌아온 강태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뺨을 감싸 쥔 채 눈물을 뚝뚝 흘리는 이소희의 모습이었다. “서은채!” 강태준은 또다시 불같이 화를 냈다. “너 또 소희한테 무슨 짓 했어!”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내가 직접 봤는데 뭘 안 했다는 거야!” 강태준은 서은채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뼈를 으스러뜨릴 정도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지난번에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 못 차렸어? 분명히 말했지. 또다시 소희한테 나쁜 짓 하면 내가 열 배로 돌려줄 거라고.” 이소희가 흐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태준아, 됐어... 나 괜찮아...” “내가 있는데 뭐가 무서워?” 강태준은 안쓰러운 얼굴로 이소희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말했잖아. 넌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돼.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겁먹지 마. 그렇게 당하고만 있으니까 자꾸 만만하게 보는 거야.” 강태준은 곧바로 경호원들에게 서은채를 제압하라고 지시했다. 양팔이 붙잡혀 꼼짝할 수 없게 되자 강태준은 이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희야, 너도 똑같이 돌려줘. 아니, 열 배로 갚아 줘.” 이소희는 겁에 질린 척 머뭇거렸다. “나, 나는 못 하겠어...” “못 하겠어? 내가 가르쳐 줄게.” 강태준은 이소희의 손을 잡아 그대로 서은채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찰싹! “당하고만 있지 말라고.” 찰싹! “겁먹고 움츠러들지 말라고.” 찰싹! 세 번, 네 번... 이소희의 손바닥이 뺨을 후려칠 때마다 서은채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입가에서는 피가 배어 나왔고 귓속에서는 날카로운 이명이 끊임없이 울렸지만, 서은채는 이를 악문 채 신음 한 번 내뱉지 않았다. 그렇게 열 번을 후려치고 나서야 멈췄다.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아무리 그래도 사모님 너무 불쌍하다. 오늘 생일이라던데...” “그러게, 누가 먼저 사람을 괴롭히래?” 강태준은 이소희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손 아프지? 가서 약 바르자.” 강태준은 그대로 이소희를 품에 안아 든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경호원들이 힘을 풀자, 서은채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열 번이나 얻어맞은 뺨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하지만 그보다 견디기 힘든 건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통증이었다. 서은채는 피가 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강태준, 후회해. 너 같은 사람을 사랑한 걸... 정말 후회해.’ 제6화 서은채는 비틀거리며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뺨은 불에 덴 듯 화끈거렸고 터진 입가에 묻은 피는 어느새 검붉게 말라붙어 있었다. 기사를 부르지 않고 직접 운전해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가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 주는 동안, 서은채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쪽 뺨은 퉁퉁 부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입가는 찢어져 있었다. 두 눈에는 핏발까지 가득 서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네.’ 서은채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가 상처가 당기는 통증에 짧게 숨을 들이켰다. 한편, 뜻밖의 두 사람이 주차장에서 치료를 마치고 돌아가려던 서은채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소희의 부모인 이기철과 고연경이었다. 두 사람은 서은채가 차에 타지 못하도록 양쪽에서 차 문을 막아선 채 애원했다. “은채 씨, 제발 강씨 가문 안주인 자리에 미련 좀 버려 주시면 안 되겠어요? 우리 소희 좀 불쌍하게 생각해서라도 이제 그 자리 좀 양보해 주세요...” 서은채는 싸늘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비키세요.” “우리 소희는 강 대표님을 진심으로 사랑해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데... 이제 그만 보내 주세요...” “비키시라고요!” 더는 상대할 가치조차 없었다. 서은채는 앞을 막아선 두 사람을 밀어내고 차 문을 열어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런데 막 출발하려던 순간, 이기철이 갑자기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퍽! 둔탁한 충격음이 울렸다. 서은채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이기철은 바닥에 쓰러져 다리를 움켜쥔 채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여보!” 고연경이 비명을 지르며 이기철에게 달려갔다. 서은채는 운전대를 꽉 움켜쥔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일부러 뛰어든 거야.’ 분명했다. ‘일부러 차 앞으로 뛰어들었어!’ 하지만 지금은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서은채는 곧바로 차에서 내려 이기철을 응급실로 데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소희가 다급하게 병원 복도를 뛰어왔다. 서은채를 발견한 이소희는 다짜고짜 손을 들어 뺨을 후려쳤다. 찰싹! 서은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귓속에서는 날카로운 이명이 울렸다. “서은채!” 이소희는 눈물을 쏟으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그런데 우리 부모님한테까지 이렇게 해야만 했어?” 조금 전 처치를 받은 상처가 다시 터지면서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이제는 통증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네 아버지가 차 앞으로 뛰어든 거야.” 서은채가 차갑게 말했다. “거짓말을 해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뒤에서 강태준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희 아버지가 왜 일부러 네 차에 뛰어들어? 서은채, 너 이런 여자였어?” 서은채는 말없이 강태준을 바라봤다. 이제 강태준은 사실을 확인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기든 강태준에게 잘못한 사람은 언제나 서은채였다. 한때 서은채의 말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믿어 주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한 옛일처럼 느껴졌다. 그때 응급실 문이 열리며 의사가 다급하게 밖으로 나왔다. “환자가 출혈이 심해서 긴급 수혈이 필요합니다. A형인데, 혹시 헌혈이 가능한 보호자 계십니까?” 이소희가 울먹이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직계가족이라 바로 수혈해 줄 수 없어요. 방사선 조사도 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럴 시간도 없잖아요...” 강태준의 시선이 곧장 서은채에게 향했다. “서은채, 너 A형이잖아. 네가 수혈해 드려.” 서은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싫어.” “사람을 쳤으면 책임져야지.” 강태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안에 있는 분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너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순간 서은채는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듯했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힘겹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끝까지 이럴 거야?” 서은채는 강태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우리 부모님 목숨을 두고 협박하더니... 이젠 나까지 죽여야 끝나겠어?” 강태준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서은채의 말이 정곡을 찌른 듯 잠시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강태준은 이내 차갑게 얼굴을 굳히고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 “데려가서 채혈해.” 결국 서은채는 경호원들에게 제압당한 채 강제로 채혈실로 끌려갔다. 의자에 꼼짝없이 눌린 상태에서 굵은 바늘이 혈관을 파고들자,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혈액 팩이 조금씩 붉게 차오를수록 서은채의 의식도 점점 흐릿해졌다.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 서은채는 원래 빈혈이 있었다. 예전의 강태준은 서은채가 어디에 살짝 부딪혀 피부가 까지기만 해도 안절부절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경호원까지 시켜 서은채를 제압하고, 일부러 차에 뛰어든 사람을 살리겠다며 강제로 피를 뽑고 있었다. 눈앞이 몇 번이고 새까맣게 꺼졌다. 결국 서은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제7화 다시 눈을 떴을 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서은채는 아직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병상에서 내려왔다. 병원을 나서던 중 어느 병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안에서 이소희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엄마. 인사해요. 제 남자 친구 태준 씨예요.” 반쯤 열린 문틈 너머로 강태준이 이소희의 허리를 감싸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분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는 제가 소희 곁에서 힘든 일 없도록 잘 지켜주겠습니다.” 고연경은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환하게 웃었다. “그래요, 그래. 우리 소희가 강 대표님 같은 사람을 만난 게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르겠어요...” 병실 밖에 서 있던 서은채는 문득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도 강태준은 지금처럼 서은채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서동만과 윤정희 앞에서 진지하게 약속했다. “두 분 걱정하지 마세요. 은채는 제가 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 한때 서은채에게 했던 약속을 이제는 다른 여자에게 똑같이 하고 있었다. ‘강태준, 네 약속은 참 쉽게도 바뀌는구나.’ 서은채는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세게 깨물다가 조용히 돌아섰다. 병원을 나온 뒤 날짜를 확인해 보니 신분 말소 절차가 끝나기까지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사흘만 지나면 부모님을 모시고 이곳을 완전히 떠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강태준이 아무리 찾아 헤매도 세상 어디에서도 ‘서은채’라는 사람을 찾지 못할 터였다. 저택으로 돌아온 서은채는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갈아입을 옷 몇 벌과 신분증, 여권처럼 꼭 필요한 물건만 가방에 챙겼다. 나머지는 아무것도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 서은채가 막 여권을 가방에 넣으려던 순간, 방문이 갑자기 열렸다. 문 앞에는 강태준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이소희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따라왔다. “아빠가 위험한 고비는 넘겼지만... 연세도 있으신데 이번에 너무 크게 다치셨어.” 이소희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강태준은 손을 들어 이소희의 눈물을 닦아 주며 다정하게 달랬다. “그만 울어. 그래서 내가 지금 네 억울함 풀어 주려고 왔잖아.” 강태준은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은채가 어떻게 사과했으면 좋겠어? 선 넘는 부탁만 아니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이소희는 겁먹은 듯 서은채를 흘끗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난... 언니가 며칠만 유치장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들은 강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소희야, 그건 좀 심해.” “태준 씨가 언니한테 모질게 못 하는 거 알아.” 이소희는 강태준의 소매를 붙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데 우리 아빠가 저렇게 크게 다쳤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면 언니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 가족을 괴롭힐 거야...” 이소희는 입술을 깨물며 더욱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며칠만... 다시는 이런 짓 못 하게 겁만 주자는 거야... 태준 씨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언니고, 나는 잠깐 만나는 여자일 뿐이라는 거 알아. 그래도 언니를 유치장에 보내는 것조차 마음 아파서 못 하겠다면 우리 그냥 끝내자.” 강태준은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체념하듯 이소희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만 만난다는 소리 하지 마.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그렇게 서은채는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 강태준은 떠나는 순간까지 서은채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소희는 달랐다. 강태준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이소희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조금 전까지 눈물을 흘리던 얼굴에는 어느새 싸늘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이소희는 서은채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더니 옆에 있던 경찰에게 무언가를 낮게 속삭였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두툼한 돈봉투를 슬쩍 건넸다. 제8화 그렇게 이어진 사흘은 서은채의 인생에서 가장 길고 끔찍한 시간이었다. 서은채는 시도 때도 없이 욕설을 들어야 했고, 누군가 일부러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바람에 무릎이 찢어져 피투성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상처를 치료해 주는 사람도, 깨끗한 물 한 모금 건네는 사람도 없었다. 서은채는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이를 악물고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사흘만 지나면 자유였다. 마침내 사흘째 저녁,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렸다. 문 앞에는 강태준이 서 있었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빛에 가려져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강태준은 서은채가 가까이 다가오고 나서야 처참한 몰골을 확인하고 순간 표정이 굳었다. “꼴이 이게 뭐야?” 서은채가 입고 있던 옷은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더러워져 있었고, 팔과 무릎에는 멍과 상처가 가득했다. 입가에도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자 이소희가 곧바로 강태준의 팔짱을 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가 일부러 다친 척하는 거 아닐까? 불쌍해 보이려고.” 이소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며칠 유치장에 있었을 뿐인데 무슨 일이 있었겠어?” 강태준은 몇 초 동안 서은채의 상처를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차갑게 굳히며 말했다. “서은채, 이제 적당히 좀 해. 언제까지 이럴 건데?” 서은채는 힘없이 입꼬리만 비틀어 올렸다. 이제는 해명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저택으로 돌아온 뒤, 강태준은 웬일인지 곧바로 이소희에게 돌아가지 않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마치 정해진 일정을 통보하듯 태연하게 말했다. “앞으로 월요일이랑 화요일은 너랑 여기서 지낼게. 나머지 날은 소희랑 있고.” 계단 앞에 서 있던 서은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수요일이니까 소희한테 가야 해.” 강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집어 들었다. “며칠 동안은 연락하지 마.” 현관까지 걸어간 강태준은 문을 열기 전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다음 주 월요일에 올게.” 서은채는 강태준을 바라보다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 잘 가.” ‘웃기지도 않아.’ 서은채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내가 다음 주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아나 봐.’ 강태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평소와 다른 서은채의 태도가 마음에 걸리는 듯했지만, 결국 아무 말 없이 저택을 나섰다.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서은채의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서은채 님, 요청하신 신분 말소 절차가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서은채는 화면에 뜬 문장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마침내 자유였다. 서은채는 미리 챙겨 둔 짐을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저택을 나섰다. 공항에 도착하자 서동만과 윤정희는 이미 탑승구 앞에서 서은채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은채가 다가오자, 윤정희는 눈시울을 붉히며 딸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은채야, 이제 다 끝났어.” 서은채도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끝났어.’ 6년 전 눈 내리던 겨울밤, 강태준은 서은채의 집 앞에서 무릎을 꿇고 평생 서은채만 사랑하며 살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6년이 흐른 지금, 서은채는 자신의 인생에 깊이 새겨졌던 강태준이라는 이름을 직접 도려냈다. 탑승을 앞두고 서은채는 휴대전화를 꺼내 유심칩을 뽑았다. 손가락에 힘을 주자 작은 유심칩이 두 동강 났다. “탑승권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의 안내에 서은채는 부러진 유심칩을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버리고 탑승권을 내밀었다. 그리고 부모의 손을 잡고 탑승구를 향해 걸어갔다. 허리를 곧게 편 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제부터 내 인생에 강태준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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