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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바람에 갇힌 거짓말
5년간의 해외 파견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나는 공항을 나서면서 심도윤이 약속대로 청혼해 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나를 마중 나온 심도윤의 얼굴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지아야, 미안해.” 내가 당황할 틈도 없이 그가 곧장 말을 이었다. “그 인사 발령... 사실은 내가 뒤에서 손을 써서 일부러 널 X국 프로젝트로 보낸 거야. 유라와 같이 있으려고...” “그때 유라가 임신해서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순간 말문이 턱 막혀서 한동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번질 때까지. 거센 모래바람과 숨이 막히는 더위 속에서 하루 16시간씩 뼈 빠지게 일했던 5년. 그 모든 시간이 처음부터 심도윤이 치밀하게 파놓은 덫이었다. “넌 성격도 불같고 막무가내잖아. 유라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됐어.” “용서를 받자고 털어놓는 게 아니야. 그냥 네가 알고 차분하게 받아들였으면 해서 말하는 거야.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마치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구는 뻔뻔한 말투였다. 심도윤이 내게 손을 뻗었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눈가가 뜨거워졌지만, 기가 차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심도윤, 원래라면 우리는 좋게 끝낼 수도 있었어. 그런데 네가 스스로 그 기회를 걷어찬 거야.”
챕터 (1)
第1章
5년간의 해외 파견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나는 공항을 나서면서 심도윤이 약속대로 청혼해 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나를 마중 나온 심도윤의 얼굴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지아야, 미안해.”
내가 당황할 틈도 없이 그가 곧장 말을 이었다.
“그 인사 발령... 사실은 내가 뒤에서 손을 써서 일부러 널 X국 프로젝트로 보낸 거야. 유라와 같이 있으려고...”
“그때 유라가 임신해서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순간 말문이 턱 막혀서 한동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번질 때까지.
거센 모래바람과 숨이 막히는 더위 속에서 하루 16시간씩 뼈 빠지게 일했던 5년.
그 모든 시간이 처음부터 심도윤이 치밀하게 파놓은 덫이었다.
“넌 성격도 불같고 막무가내잖아. 유라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됐어.”
“용서를 받자고 털어놓는 게 아니야. 그냥 네가 알고 차분하게 받아들였으면 해서 말하는 거야.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마치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구는 뻔뻔한 말투였다.
심도윤이 내게 손을 뻗었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눈가가 뜨거워졌지만, 기가 차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심도윤, 원래라면 우리는 좋게 끝낼 수도 있었어. 그런데 네가 스스로 그 기회를 걷어찬 거야.”
제1화
심도윤의 차는 내가 탄 택시 뒤를 줄곧 따라오더니 몇 번이나 헤드라이트를 깜빡였다.
기사가 백미러로 나를 힐끗 봤다.
“아가씨, 뒤에 저 BMW가 계속 따라오는데 아는 사람이에요?”
나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
“아니요.”
“그럼 떼어 드릴까요?”
“괜찮아요. 저 사람도 제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요.”
아파트는 5년 전 그대로였다. 엘리베이터 안의 광고판만 바뀌어 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현관 앞에 도착해서 열쇠를 꺼냈다.
열쇠를 꽂으려던 순간, 안에서 문이 열렸다.
임유라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서 있었다. 품에는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안겨 있었다.
나를 본 임유라는 잠깐 놀란 표정이더니 금세 웃었다.
“돌아오셨네요.”
아이는 임유라의 목을 끌어안은 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엄마, 이 아줌마 누구예요?”
“예전에 여기 살던 아줌마야.”
임유라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를 바라봤다.
“들어와서 잠깐 앉을래요? 도윤 씨한테 오늘 돌아온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나는 임유라의 뒤로 보이는 거실을 바라봤다.
벽에는 두 사람의 결혼사진이 걸려 있었고, 소파도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베란다에는 아이 옷이 널려 있었다.
“여기...”
“제 집이에요.”
임유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말을 끊었다.
“5년 전부터요. 도윤 씨가 이 집을 넘겨받자마자 저한테 들어와 살라고 했어요.”
캐리어를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지아 씨가 X국으로 떠나면 결혼하자고 하더라고요.”
아이가 몸을 비틀며 내려가겠다고 보챘다.
임유라가 아이를 내려놓자, 아이는 곧장 거실의 장난감 상자로 달려갔다.
임유라는 문틀에 기댄 채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살이 많이 빠졌네요. X국 생활이 많이 힘들었죠?”
나는 캐리어 손잡이를 꽉 쥐었다.
“도윤 씨는 이따 들어와요?”
“모르겠는데요.”
임유라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도윤 씨는 왜 찾으세요? 돈이라도 받으려고요? 아니면 따지러 온 거예요?”
“아무것도 안 바라요.”
“그럼 왜 돌아왔어요?”
말끔하게 관리된 임유라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제 걸 되찾으러 왔어요.”
임유라가 웃었다.
“지아 씨 물건이 아직 남아 있을 것 같아요? 옷은 진작에 버렸고, 책은 도윤 씨가 자리만 차지한다고 해서 다 팔았어요. 아, 그리고 키우던 화분도 전부 죽었어요.”
잠시 뜸을 들인 임유라가 덧붙였다.
“제가 일부러 물을 안 줬거든요.”
나는 돌아서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뒤에서 임유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 씨, 괜히 일을 크게 만들지 마세요. 지금 지아 씨한테 남은 게 뭐가 있다고 그래요? 어차피 저를 못 이겨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차가운 금속 벽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5년.
나는 그 시간을 내 커리어를 쌓는 5년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동안 두 사람은 내가 돌아갈 자리에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다음 날, 복귀 절차를 밟으러 회사에 갔다.
인사팀의 이수정이 나를 보더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지아 씨, 자리 말인데...”
“알아요. 제 자리, 지금 임유라 씨가 맡고 있죠.”
나는 캐리어를 구석에 세워 두었다.
“괜찮아요. 일반 업무로 배정해 주세요.”
제2화
이수정은 한숨을 내쉬며 컴퓨터에서 내 인사 기록을 열었다.
“지아 씨가 X국에서 보낸 5년은 본인이 자원해서 파견을 신청했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맡은 업무를 무사히 마친 걸로 기록되어 있어요.”
“맞아요.”
“그런데...”
이수정이 목소리를 낮췄다.
“지아 씨가 주도했던 세 가지 프로젝트 있잖아요. 성과 보고서에는 전부 임유라 씨가 책임자로 올라가 있어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럴 리가요. 그건 제가...”
“지아 씨가 직접 서명해서 동의한 거예요.”
이수정이 파일 하나를 열어서 내 쪽으로 돌려놓았다.
“보세요. 5년 전에 작성된 합의서예요. 프로젝트 성과를 팀 전체가 공유하는 데 동의한다고 지아 씨가 서명했어요.”
분명 내 서명이었다.
하지만 이런 서류에 서명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그때 워낙 급하게 떠났잖아요. 서류 대부분은 대표님이 대신 처리해 주셨고요.”
이수정은 뭔가 더 말하려다가 그만뒀다.
“지아 씨, 어떤 일들은... 됐어요. 일단 자리로 가세요.”
5년 만에 돌아온 내 자리는 사무실 구석, 프린터 바로 옆이었다.
책상 위에는 잡동사니가 잔뜩 쌓여 있었다.
동료들은 내 옆을 지나가면서 못 본 척하거나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박나미만 다가와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아 씨, 왜 돌아왔어요?”
“프로젝트가 끝났어요.”
“그럼...”
박나미는 임유라의 사무실 쪽을 한번 바라봤다.
“조심해요. 유라 씨가 지금 팀장이잖아요. 게다가 대표님이 남편이기도 하고요.”
나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알아요.”
오후가 되자 핸드폰이 울렸다.
심도윤이었다.
받지 않았다.
하지만 곧 다시 전화가 걸려 왔고, 연달아 세 번이나 울렸다.
네 번째 전화가 왔을 때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아야, 우리 얘기 좀 하자.]
“할 말 없어.”
[유라가 둘째를 임신했는데 상태가 좀 안 좋아. 의사가 스트레스 받으면 안 된대.]
심도윤의 목소리에는 피곤한 기색이 묻어났다.
[그래서 말인데... 당분간 유라 눈앞에만 안 나타나 주면 안 될까?]
그때 핸드폰 너머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엄마가 토해요!]
[알았어, 갈게.]
심도윤은 다급하게 말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해 줘. 부탁이야.]
전화가 끊어졌다.
한동안 꺼진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다 문득 5년 전이 떠올랐다.
인사 발령이 났던 날, 나는 울면서 심도윤에게 전화했다.
[기다려. 금방 갈게.]
잠시 후 달려온 심도윤은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다녀와. 경험 쌓는다고 생각해. 기다리고 있을게. 돌아오면 우리 결혼하자.”
그날 심도윤에게서는 희미한 향수 냄새가 났다.
평소 그가 쓰던 것과는 다른 향이었다.
이제야 알았다.
그게 임유라의 향수 냄새였다는 걸.
나는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
의사는 검사 결과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서지아 씨, 검사 결과가...”
“그냥 말씀해 주세요.”
“자궁내막증이 있고, 난소 기능도 많이 저하된 상태입니다.”
의사가 안경을 고쳐 썼다.
“자연 임신 가능성은 상당히 낮아 보입니다.”
검사 결과지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종이 모서리를 깊이 파고들었다.
“근무 환경 때문인가요?”
“장기간 고강도 업무를 하셨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으셨죠. 그런 생활을 오래 버틴 것도 몸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됐을 겁니다.”
의사가 잠시 말을 멈췄다.
“아직 젊으시니까 지금부터 꾸준히 치료하고 관리하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진료실을 나와 보니 복도에는 임산부 몇 명이 앉아 있었다.
배를 쓰다듬으면서 웃는 얼굴들은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한 남자는 아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배에 귀를 대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들의 곁을 지나서 비상계단의 문을 열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울면 안 돼.’
‘울면 지는 거야.’
사흘 뒤, 회사에서 송년회가 열렸다.
애초부터 갈 생각이 없었지만 박나미가 말했다.
“지아 씨도 오래 근무했는데 빠지면 보기에 안 좋아요.”
나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행사장 구석에 서 있었다.
조명은 밝았고 음악은 시끄러웠다.
잠시 후 심도윤과 임유라가 팔짱을 낀 채 입구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몰려갔다.
“대표님, 유라 씨, 축하드려요!”
“둘째까지 생기셨다니 정말 경사네요!”
임유라는 웃으며 감사하다고 인사했고, 한 손은 계속 배 위에 올려 두고 있었다.
심도윤은 임유라의 허리를 감싼 채 다정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그때 누군가 나를 발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슬쩍 눈짓했다.
웃음소리가 잠시 끊어졌다.
하지만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임유라가 불러온 배를 감싸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지아 씨, 오랜만이네요.”
제3화
나는 샴페인 잔을 든 채 말했다.
“축하해요.”
“고마워요.”
임유라는 배를 쓰다듬었다.
“병원에서 딸이랬어요. 도윤 씨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딸은 엄마를 닮아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나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거 알아요? 도윤 씨가 그러더라고요. 그때 지아 씨를 X국으로 보내지 않았으면 한참 더 고민했을 거라고요.”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예요.”
임유라가 환하게 웃었다.
“그때 지아 씨가 떠나 줘서 정말 다행이었다고요. 지아 씨가 그렇게 희생해 준 덕분에 저희가 지금 이렇게 사는 거잖아요.”
내 손이 떨렸다.
잔에 담긴 샴페인이 몇 방울 튀면서 원피스 위로 떨어졌다.
“임유라 씨.”
나는 임유라를 똑바로 바라봤다.
“첫째를 임신하셨을 때, 저는 X국 현장에서 40도가 넘는 고열로 죽을 뻔했다는 거 알아요?”
임유라가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요?”
“그날 도윤 씨한테 17번이나 전화했어요. 한 번도 안 받았고요.”
“그날은 저희 기념일이었어요.”
임유라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도윤 씨는 저랑 웨딩드레스 고르고 있었고요.”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임유라가 덧붙였다.
“한정판이었어요. 허리에 진주 자수가 들어간 거.”
그 드레스는 5년 전 내가 입어 봤던 드레스였다.
그때 심도윤은 내게 말했다.
“우리 결혼할 때 이걸로 하자.”
그때 그가 말한 ‘우리’에 나는 처음부터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잔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심도윤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심도윤이 입을 열었다.
“지아야...”
“내 이름 부르지 마. 역겨워.”
연회장을 나서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처마 아래에 서서 빗속에 흐릿해진 도시를 바라봤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심도윤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내밀었다.
“써. 감기 걸려.”
“너랑 무슨 상관이야?”
심도윤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나 미워하는 거 알아.”
“안 미워해.”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냥 너 같은 인간 때문에 내 인생 5년을 날렸다는 게 아까울 뿐이야.”
“그 5년은...”
“그 5년 동안 난 X국에서 하루 16시간씩 일했어.”
나는 심도윤의 말을 끊었다.
“생리를 석 달씩 못 하고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져도 버텼어. 돌아오면 너랑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심도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는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그런데 넌 그동안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이제 둘째까지 생겼네.”
“미안해.”
“미안하다고 하면 다야?”
나는 심도윤을 바라봤다.
“심도윤, 난 이제 널 미워할 기운도 없어. 그냥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견딜 수가 없어.”
빗줄기가 점점 거세졌다.
심도윤이 우산을 펴서 나한테 씌워 주려고 했다.
나는 그 손을 밀어내고 그대로 빗속으로 걸어갔다.
차가운 비에 온몸이 흠뻑 젖었다.
일주일 뒤, 집에서 전화가 왔다.
엄마는 울고 있었다.
[지아야, 아빠가 입원했어!]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원래 심장병이 있던 아버지는 창백한 얼굴로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엄마가 내 손을 붙잡았다.
“누가 아빠한테 편지를 보냈어. 네가... 남의 가정을 깨뜨린 여자라고 하더라.”
“아니에요!”
“사진까지 다 있어!”
엄마는 눈물을 훔쳤다.
“너랑 심도윤이 주고받은 대화 내용이랑 회사 사람들이 한 말까지...”
나는 엄마에게서 봉투를 빼앗았다.
사진은 합성된 거였고, 대화 내용도 조작돼 있었다.
하지만 너무 정교해서 진짜처럼 보였다.
“아빠, 내 말 좀 들어 봐요...”
아버지가 눈을 뜨고 한참 동안 나를 바라봤다.
“아빠는 너 믿는다.”
그 말을 끝으로 아버지는 다시 눈을 감았다.
곧 심전도 모니터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의료진이 급히 병실로 들어왔고, 나는 병실 밖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병실 앞에 심도윤이 서 있었다.
손에는 과일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아버님 뵈러 왔어.”
마침 지나가던 간호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심도윤 씨 정말 좋은 분이네요. 전 여친 아버님 병문안까지 오시고.”
순간 이성을 잃은 나는 심도윤에게 달려들면서 거세게 뺨을 후려쳤다.
과일 바구니가 바닥에 떨어지며 과일이 사방으로 굴러갔다.
“네가 한 짓이지?”
“난 모르는 일이야...”
“모른다고?”
나는 심도윤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제4화
“그 사진이랑 대화 내용, 너 말고 또 누가 가지고 있어?”
심도윤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지아야, 진정해!”
“내가 어떻게 진정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리 아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절대 가만 안 둬!”
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
의사가 밖으로 나오며 마스크를 벗었다.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사흘 뒤, 아버지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엄마는 내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조차 막았다.
“가.”
문 너머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아빠도 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나는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꼼짝하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심도윤과 임유라가 찾아왔다.
두 사람은 조화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조화 리본에는 아버지의 명복을 빈다는 문구와 함께 심도윤과 임유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를 발견한 임유라가 조용히 말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어요.”
나는 심도윤을 노려봤다.
심도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임유라가 남자의 소매를 가볍게 잡아당겼다.
“이제 가자.”
두 사람이 돌아간 뒤에야 엄마가 문을 열었다.
엄마는 나를 원망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제 만족해? 네 아빠가 죽었어. 이제 됐어?”
나는 무릎을 꿇은 채 안으로 들어가서 엄마의 다리를 붙잡았다.
“엄마...”
“손대지 마!”
엄마가 나를 밀쳐 냈다.
“난 너 같은 딸 없어!”
나는 힘없이 바닥에 엎어졌다. 차가운 타일에 이마를 댄 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일주일째 되던 날,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서지아 씨, 오늘부로 해고됐습니다.]
인사팀 직원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사규를 심각하게 위반하셨기 때문입니다. X국 프로젝트 근무 기간 동안 여러 남성 동료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내용이 접수됐습니다.]
나는 곧장 회사로 달려가서 인사팀 사무실로 들어갔다.
“증거가 뭐죠?”
인사팀장이 사진 한 뭉치를 내 앞에 던졌다.
X국 현장에서 남자 동료들과 일하던 사진들이었다.
평범한 업무 사진마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문구가 붙어 있었다.
“이건 명예훼손이잖아요!”
“아무 일도 없는데 이런 얘기가 나오겠어요?”
인사팀장이 나를 바라봤다.
“회사는 이런 직원을 계속 근무하게 둘 수 없습니다.”
나는 심도윤을 찾아갔다.
비서가 나를 막아섰다.
“대표님은 지금 회의 중이세요.”
나는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 뒤 회의실에서 나온 심도윤은 나를 보자 걸음을 멈췄다.
“무슨 말 하러 왔는지 알아.”
심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회사에서 내린 결정이야.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심도윤, 네가 날 함정에 빠뜨린 거잖아.”
“내가 아니야.”
심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유라가 그러는데...”
“임유라가 하는 말은 뭐든 다 믿어?”
나는 심도윤 앞으로 다가갔다.
“그 여자 때문에 우리 아빠가 죽었어. 이제는 내 인생까지 망치려는데, 그래도 계속 감싸 줄 거야?”
심도윤이 한 걸음 물러섰다.
“지아야, 진정해.”
“내 정신은 지금 멀쩡해.”
나는 심도윤을 바라봤다.
“하나만 물어보자. 당신은 밤에 잠이 와?”
심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돌아섰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7, 8명이 피켓을 든 채 나를 에워쌌다.
“상간녀!”
“더러운 여자!”
“이 도시에서 꺼져!”
갑자기 누군가 내 쪽으로 뭔가를 끼얹었다.
붉은 잉크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대로 뒤집어썼다.
나는 온몸에서 붉은 물을 뚝뚝 흘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지하 주차장에서 나온 심도윤의 차가 길가에 멈췄다.
심도윤이 차에서 내리더니 사람들을 제지했다.
그리고 내 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서지아, 왜 그냥 조용히 끝내지를 못해? 꼭 일을 이렇게까지 키워야겠어?”
나는 얼굴을 한번 훔쳤다.
손가락 사이로 붉은 물이 흘러내렸다.
“조용히?”
헛웃음이 나왔다.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
심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차에 오른 뒤 떠나 버렸다.
내가 세 들어 살던 집으로 돌아가 보니 도어락 비밀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짐은 전부 문밖에 나와 있었다.
집주인이 안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짐은 다 빼놨어요. 얼른 가져가요.”
“왜요?”
“민원이 들어왔어요. 행실이 안 좋은 사람이라 동네 분위기까지 흐린다고.”
집주인은 손을 내저었다.
“이제 방 못 빌려 줘요.”
나는 캐리어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5년 전 X국으로 갈 때도 이 캐리어를 들고 갔다.
지금도 캐리어는 그대로였다.
그런데 다시 돌아와 보니 내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편의점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
날이 밝았다.
창밖의 도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더는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