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번째 약속도 너는 없었다

GoodNovel 완결

심우열은 원칙주의자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시간을 철저히 지키고 규칙을 어기는 법도 없었으며, 한 번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혼인신고만큼은 방연서를 무려 8번이나 바람을 맞혔다. 첫 번째는 8년 동안 해외에 나가 있던 후배 이현지가 귀국하는 날이라 공항에 마중을 나갔다. 두 번째는 이현지가 요리를 하다 손가락을 살짝 데었다고 하자, 심우열은 혼인신고를 하러 가던 도중에 되돌아가서 그녀에게 약을 발라줬다. 세 번째는 이현지의 아들이 아파서, 급히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 이번이 벌써 8번째였다. 이번에도 심우열은 나타나지 않았다. 심우열은 급하게 전화만 한 통 걸어왔다. [급한 일이 생겼어. 조금 늦을 것 같아.] 방연서는 눈앞에서 두 사람의 번호를 차례로 부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창구 직원이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가씨, 남자친구분은 또 안 오셨어요? 저희 곧 퇴근해야 하는데...” 방연서가 다시 전화를 걸려던 순간, 심우열의 문자가 먼저 도착했다. [오늘 혼인신고는 못 할 것 같아. 다음에 하자.] 그 문자를 바라보는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씁쓸한 느낌이 차올랐다. 방연서가 휴대폰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이현지의 SNS 게시물에 시선이 멈췄다. 사진 속 이현지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 옆에는 그녀의 아들을 안은 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심우열이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글이 적혀 있었다. [현준이가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고 했어요. 오늘 하루 함께해준 선배님, 감사해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목구멍에 납덩이가 들어찬 것처럼 무겁고 답답했다. 결국 심우열이 말한 급한 일이란, 이현지의 아들을 놀이공원에 데려가는 일이었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이 아팠고, 서러움과 분노에 온몸이 떨렸다. 심우열에게 당장 전화해서 따지려던 그때, 댓글에서 남자의 친구가 남긴 장난스러운 글이 눈에 들어왔다. [몇 년이 지나도 우열이는 여전히 후배를 각별히 아끼네.]

챕터 (1)

第1章

심우열은 원칙주의자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시간을 철저히 지키고 규칙을 어기는 법도 없었으며, 한 번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혼인신고만큼은 방연서를 무려 8번이나 바람을 맞혔다. 첫 번째는 8년 동안 해외에 나가 있던 후배 이현지가 귀국하는 날이라 공항에 마중을 나갔다. 두 번째는 이현지가 요리를 하다 손가락을 살짝 데었다고 하자, 심우열은 혼인신고를 하러 가던 도중에 되돌아가서 그녀에게 약을 발라줬다. 세 번째는 이현지의 아들이 아파서, 급히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 이번이 벌써 8번째였다. 이번에도 심우열은 나타나지 않았다. 심우열은 급하게 전화만 한 통 걸어왔다. [급한 일이 생겼어. 조금 늦을 것 같아.] 방연서는 눈앞에서 두 사람의 번호를 차례로 부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창구 직원이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가씨, 남자친구분은 또 안 오셨어요? 저희 곧 퇴근해야 하는데...” 방연서가 다시 전화를 걸려던 순간, 심우열의 문자가 먼저 도착했다. [오늘 혼인신고는 못 할 것 같아. 다음에 하자.] 그 문자를 바라보는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씁쓸한 느낌이 차올랐다. 방연서가 휴대폰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이현지의 SNS 게시물에 시선이 멈췄다. 사진 속 이현지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 옆에는 그녀의 아들을 안은 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심우열이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글이 적혀 있었다. [현준이가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고 했어요. 오늘 하루 함께해준 선배님, 감사해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목구멍에 납덩이가 들어찬 것처럼 무겁고 답답했다. 결국 심우열이 말한 급한 일이란, 이현지의 아들을 놀이공원에 데려가는 일이었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이 아팠고, 서러움과 분노에 온몸이 떨렸다. 심우열에게 당장 전화해서 따지려던 그때, 댓글에서 남자의 친구가 남긴 장난스러운 글이 눈에 들어왔다. [몇 년이 지나도 우열이는 여전히 후배를 각별히 아끼네.] 제1화 이현지는 곧바로 아래에 긴 댓글을 남겼다. [선배가 최고예요! 7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내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선배가 바보같이 아래에서 3시간이나 기다려 줬어요.] [우리가 일어나서 배고플까 봐 미리 따뜻한 죽도 사다 놓고, 태국식 코코넛 해산물 전골까지 먹으러 데려갔어요.] [몇 년이 지나도 선배는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선배예요!] 그러자 곧바로 누군가 댓글을 남겼다. [그게 그 폭우가 쏟아지는 날, 5분 늦었다고 인턴 자격을 박탈했다는 그 심우열 맞아?] [쟤 원칙까지 저버리게 만드는 사람은 후배 한 사람뿐이야. 다른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해.] 곧이어 심우열의 소꿉친구가 물었다. [오늘 방연서랑 혼인신고 하러 가는 거 아니었어? 벌써 7번이나 약속을 어겼는데, 이번에도 또 바람맞힐 거야?] 이현지가 깜짝 놀란 표정의 이모티콘을 달았다. [어머! 선배가 오늘 혼인신고 하는 날인 걸 깜빡했어요!] [현준이랑 관람차도 타기로 해서 선배가 꼭 같이 가겠다고 했거든요. 지금 바로 돌아가라고 할게요.] 그런데 바로 그 댓글 아래에 심우열의 답글이 달렸다. [혼인신고는 언제 하든 상관없어. 그냥 형식일 뿐이니까 괜찮아.] 누군가 장난스럽게 댓글을 남겼다. [이럴 거면 차라리 신부를 현지로 바꾸는 건 어때?] 심우열은 그 댓글에 곧바로 답을 했다. [그런 농담은 하지 마. 현지한테 괜한 소문만 생겨.] 또 누군가 물었다. [저기... 이런 댓글들 방연서가 보는 건 아니겠지?] 심우열이 답했다. [괜찮아. 젊은 여자가 혼자 아이를 키우느라 힘든데, 내가 좀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야. 연서는 원래 이해심이 많으니까 분명 이해해 줄 거야.] 화면 속 댓글들을 바라보며, 휴대폰을 쥔 방연서의 손끝이 조금씩 하얗게 질려갔다. 6년의 연애 기간 동안, 심우열은 고지식하고 재미없는 사람이었지만, 방연서의 모든 취향을 기억했다. 생리 기간이면 따뜻한 차를 준비해 줬고, 쇼핑할 때면 미리 편한 신발을 챙겨주곤 했다. 심우열은 늘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달콤한 말은 잘 못 해도, 너에게 약속한 건 하나도 빠짐없이 지킬게.” 방연서는 그것이 심우열이 줄 수 있는 사랑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현지가 돌아온 지 보름 만에, 심우열은 이현지 때문에 혼인신고 당일에만 8번이나 약속을 어겼다. 이현지와 비교하고 나니, 심우열이 말하던 사랑이라는 게 우스울 정도로 값싸게 느껴졌다. 방연서가 심우열을 기다리며 혼인신고를 하러 와 있을 때, 남자는 이현지의 집 아래에서 이현지가 늦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연서가 배를 곯은 채 멍하니 앉아 있을 때, 심우열은 그녀가 오래전부터 먹고 싶다고 해도 시간 낭비라며 귀찮아했던 태국식 코코넛 해산물 전골을 먹고 있었다. 방연서가 혼인신고 담당 직원들의 수군거림을 듣고 있을 때, 심우열은 이현지 모자와 함께 놀이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순간, 방연서는 문득 모든 것이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졌다. 눈앞의 유리창을 누군가 다시 두드렸다. “아가씨, 저희 이제 퇴근해야 해요. 벌써 8번이나 오셨잖아요. 다음부터는 남자친구랑 시간부터 확실히 맞추세요. 혼자 멍하니 기다리지 말고요.” 방연서는 고개를 들어 웃어 보였다. “다시는 안 기다릴 거예요.” 방연서는 구청을 나서며, 미리 준비해 둔 답례용 사탕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혼인신고가 그저 형식일 뿐이라면, 이 결혼은 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제2화 방연서는 목적지도 없이 거리를 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옆에서 경적 소리가 들리더니 차 한 대가 방연서 앞에 멈춰 섰다. 심우열이 차에서 내렸다. “전화 왜 안 받아?” 방연서는 휴대폰을 힐끗 보았다. “배터리가 나갔어.” 심우열은 더 묻지 않고, 조수석 문을 열면서 방연서가 안전하게 앉도록 챙겼다. “오래 기다렸어?” “오늘은 정말 일이 있어서 자리를 뜰 수가 없었어. 내일 오전에는 수술이 없으니까, 같이 혼인신고 하러 가자.” 방연서는 창밖으로 스쳐 가는 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됐어.” 심우열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 맞다. 내일은 토요일이구나. 그럼 다음에 가자. 어차피 결혼식까지는 아직 시간도 있으니까.” “놀이공원 갔었어?” 방연서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현지가 올린 글 봤어?” “그럼 이해할 만하잖아. 현지는 이제 막 귀국했는데, 혼자 현준이를 데리고 다니는 게 얼마나 불편하겠어.” 이현지 이야기를 꺼낼 때 심우열의 표정은 방연서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정함으로 가득했다. “현지가 돌아온 날 너도 봤잖아. 착하고 귀여운 데다 조금 덜렁대는 애야. 너도 걔를 좀 더 알게 되면 분명 좋아하게 될 거야.” 방연서는 그저 비웃음만 나왔다. 이현지는 자신보다 2살이나 많은 데다가 아이도 벌써 4살인데, 심우열의 눈에는 영원히 철없는 어린 소녀일 뿐이었다. 심우열은 혼자서 추억에 잠겨 말을 이었다. “대학 때가 생각나네. 나랑 현지가 다친 유기견 한 마리를 봤거든.” “현지가 그 자리에서 불쌍하다며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기가 먹기 아까워하던 초콜릿까지 그 개한테 먹였어.” “그 바보 같은 애가 개한테 초콜릿을 먹이면 안 되는 것도 모르고.” “나중에 같이 그 개를 키웠는데, 1년도 안 돼서 개가 죽었어.” “그때 현지가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다시는 개는 안 키운다고 했거든. 그런데 지금은 아이까지 이렇게 잘 키우고 있네.” 심우열이 다른 여자의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일처럼 줄줄 늘어놓는 것을 들으며, 방연서의 손톱은 깊게 살을 파고들었다. “듣기 싫어.” 방연서가 말을 끊었다. “그런 이야기 듣는 거 싫어” 심우열은 뜻밖이라는 듯이 방연서를 쳐다보았다. “화났어?” “응. 결혼식 취소하자.” 잠시 후, 심우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지. 나도 그런 형식적인 건 별로 안 좋아하니까.” “아니면 신혼 여행 어때? 프라하로 가자. 현지가 거기는 동화 속 세상 같다고 했거든.” 또 이현지였다. 방연서의 마음은 완전히 차갑게 식어버렸다. “심우열, 우리 헤어지자. 내가 너희 둘을 위해 물러나 줄게.” “방연서.” 심우열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함부로 현지를 의심하지 마. 나는 그냥 현지를 여동생으로 생각할 뿐이야.”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너도 이해해 주면 안 돼?” “너도 알잖아. 내 원칙은 결혼 날짜까지 정해졌으면 신부는 오직 너뿐이라는 거. 너도 이제 좀 성숙해질 때가 됐잖아.” “그리고...” 심우열이 방연서를 바라보았다. “우리 6년이나 함께했잖아. 네가 나를 떠날 수 있겠어?” 방연서의 가슴 깊은 곳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외도를 알게 된 뒤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봤기에, 방연서는 원래 사랑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있었다. 그런 방연서가 하필이면 원칙이라면 누구보다 철저한 심우열을 사랑하게 됐다.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걸을까 두려웠지만, 결국 어머니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바쳤다. 심우열을 위해 방연서는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남자의 일상을 돌보았다. 모든 잡다한 일을 도맡아 했고, 심지어 자신의 커리어와 앞날까지도 다 포기했다. 그래서 심우열은 방연서가 철이 들었고, 이해심도 많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6년간의 헌신 때문에라도, 방연서는 도저히 심우열을 떠날 수 없을 거라고. 그리고 방연서 또한 심우열이 아버지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모든 배신을 차단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잊고 있었다. 외도에는 정신적 외도라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 바로 그때, 심우열의 휴대폰이 울렸다. 심우열은 전화를 받으며, 목소리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현지야, 무슨 일이야?” [선배, 나 지금 술집인데, 올래요?] 심우열은 원래 술집 같은 시끄러운 곳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런데도 심우열은 망설이는 기색은 전혀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래, 바로 갈게.” 전화를 끊고, 심우열은 갑자기 핸들을 꺾어 차를 길가에 세웠다. “먼저 택시 타고 돌아가. 현지가 술집에 있는데, 걱정돼서 안 되겠어.” 방연서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차는 이미 쏜살같이 멀어져 버렸다. 심우열은 이현지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방연서의 휴대폰이 꺼졌다는 사실은 잊고 있었다. 그리고 방연서가 어둠을 무서워한다는 것도. 쾅! 천둥소리가 폭발하듯 울려 퍼지더니, 차가운 빗줄기가 순식간에 방연서에게 쏟아졌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방연서는 폭우 속을 밤새도록 걸었다. 방연서의 마음도 밤새도록 차갑게 식어갔다. 날이 밝을 무렵, 방연서는 흠뻑 젖은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요리라고는 한 번도 한 적 없는 심우열이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심우열은 방연서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다소 놀랐다. “왜 이렇게 비를 맞았어? 밤새 집에도 안 들어오고 전화 한 통도 안 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아이가 방연서의 한정판 피규어를 들고 안방에서 뛰어나오다가 그녀와 부딪혔다. “현준아!” 이현지가 안방에서 쫓아 나왔다. “너 왜 그런 더러운 것에 자꾸 달려드는 거야.” 제3화 말을 마친 이현지는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듯, 얼른 입을 가리며 당황한 얼굴로 방연서를 쳐다보았다. “아, 미안해요. 연서 씨를 더러운 거라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그냥 온몸이 다 젖어 있길래...” 이현지는 당황한 표정으로 심우열을 바라보았다. “선배, 얼른 설명해 주세요. 정말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연서 씨가 오해해서 또 나한테 화내면 어떡해요?” 심우열은 웃으면서 이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 연서가 너한테 화낼 리가 없잖아. 그렇게 속 좁은 사람도 아닌데.” 심우열은 고개를 돌려 방연서를 바라보았다. “현준이가 새 옷으로 갈아입었잖아. 네가 온몸이 다 젖어 있으니까 아이 옷을 더럽힐 수도 있어.” “넌 저 애가 얼마나 말썽꾸러기인지 몰라. 내가 어제 새 옷 10벌을 사줬는데, 순식간에 8벌을 더럽혔어.”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가 한자리에 서 있는 모습은 마치 한 가족 같았다. 방연서는 심우열을 보지 않고, 이현지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네가 입은 내 잠옷 벗어.” 그 잠옷은 비단에 수놓은 자수로, 어머니가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서 원앙을 수놓은 것이었다. 방연서가 결혼할 때 입으라고 만들어준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잠옷을 이현지가 입고 있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현지는 방연서의 눈빛에 겁먹은 듯 몸을 움츠리며, 억울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요. 나... 지금 바로 벗을게요.” 이현지는 도움을 청하듯 심우열을 바라보며, 눈가가 붉어졌다. “그런데... 내 옷이 어젯밤에 더러워져서 선배가 빨아줬는데 아직 안 말랐어요...” 심우열은 못마땅하다는 듯 방연서를 바라보았다. “겨우 옷 한 벌 가지고, 뭐 하는 거야?” 방연서는 밤새 쌓아온 억울함과 분노가 이 순간 폭발했다. “어젯밤에 당신은 나를 택시도 못 잡는 길거리에 던져두고, 술집에 있는 당신의 소중한 후배를 만나러 갔어!” “내 휴대폰은 배터리가 나갔고, 난 폭우 속을 밤새 걸어서 돌아왔어!” “돌아와서 보니, 내 약혼자는 다른 여자와 밤을 보냈고, 그 여자는 우리 엄마가 내 결혼을 위해 만들어준 잠옷을 입고 있어!” “심우열, 내가 어떤 표정으로 너희를 봐야 하는데?” 이현지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제발 오해하지 마세요!” “어젯밤에 술을 많이 마셔서 선배가 걱정되어서 나를 데려온 것뿐이에요.” “우리 아무 일도 없었어요. 따로 잤단 말이에요!” 이현지는 울먹이며 심우열을 바라봤다. “선배, 내가 어떻게 해야 연서 씨가 우리를 오해하지 않을까요?” 그때 현준이 손에 쥔 피규어를 방연서의 머리를 향해 힘껏 던졌다. 피규어가 방연서의 뺨을 스치며 길게 상처를 냈다. “우리 엄마 괴롭히지 마! 이 나쁜 년!” 조금 전까지 미안한 기색을 보이던 심우열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 “네 더러운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까지 너처럼 더럽다고 생각하지 마!” “그리고 다 큰 사람이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돌아와서는 죄 없는 현지한테 화풀이해?” 방연서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너희 둘은 그렇게 깨끗하고 순수한 사이란 거지?” “그만 싸워요!” 이현지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다 내 잘못이에요. 지금 바로 잠옷 벗어서 돌려줄게요!” 이현지는 그러면서 두 손으로 입고 있던 잠옷을 잡아당겼다. 잠옷이 이현지의 어깨 부분부터 크게 찢어져 버렸다. 이현지는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면서 더욱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미안해요...” 심우열은 곧바로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이현지의 어깨에 걸쳐주며, 부드럽게 달랬다. “괜찮아, 네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잖아.” 방연서는 찢어진 잠옷을 바라보며 온몸이 떨렸다. 이현지는 분명 일부러 그런 것이다! 방연서는 달려가 손을 들어 이현지의 뺨을 때리려고 했지만, 내리치려는 손목을 심우열이 꽉 붙잡았다. “너 미쳤어?” “겨우 잠옷 한 벌 가지고 왜 이래? 내가 새로 한 벌 사주면 되잖아.” 방연서는 분노로 목소리까지 떨렸다. “이건 우리 엄마가 나한테 만들어준 거야. 뭐로 보상할 건데?” 방연서의 어머니는 한때 이 일대에서 소문난 자수 장인이었다. 아버지의 배신으로 마음의 병을 얻고, 결국 심장까지 상해 다시는 바늘을 제대로 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방연서의 결혼을 앞두자, 몸을 돌보지 않고 온갖 정성을 쏟아서 몰래 이 잠옷을 수놓아준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현지가 그것을 망가뜨려 버렸다. “그럼 더 간단하네. 네 엄마한테 한 벌 더 만들어달라고 하면 되잖아.” 심우열은 방연서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곧 결혼할 건데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 가서 좀 진정해.” 방연서는 심우열을 바라보며, 어처구니없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했다. “넌 이현지 때문에 혼인신고를 하기로 한 약속을 8번이나 어겼어.” “이현지 때문에 나를 폭우 속에 혼자 버려뒀어. 그리고는 이현지에게 우리 엄마가 만들어준 신혼 잠옷을 입히고, 우리 결혼 침대에서 자게 했어.” “심우열, 대체 무슨 근거로 내가 이 결혼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 결혼, 안 할 거야!” 바로 그때, 현관문이 갑자기 열렸다. 방연서의 어머니가 경악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연서야, 왜 결혼을 안 한다는 거야?” 제4화 어제 박수정은 딸에게 이번에는 혼인신고를 무사히 마쳤는지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딸에게 몇 번을 전화해도 계속 꺼져 있었고, 심우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박수정은 밤새 걱정하다가, 오늘 아침 일찍 딸의 집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방연서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박수정의 시선이 실내를 훑었다. 온몸이 흠뻑 젖고,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딸과 자신이 딸을 위해 만들어준 신혼 잠옷을 입고 있는 여자. 그 여자와 아이를 감싸면서 자신의 딸을 노려보고 있는 심우열이 보였다. 그동안 왜 몇 번이나 혼인신고를 하지 못했는지, 이제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박수정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박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엄마!” 방연서가 바닥에 쓰러진 박수정에게 달려들었다. “엄마, 나 놀라게 하지 마!” 박수정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숨을 가쁘게 쉬면서, 손은 가슴팍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심우열이 급히 다가와서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빨리 구급차 불러.” 곧 구급차가 도착했고, 박수정은 응급실로 실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치의가 진료 기록지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나왔다. “환자분은 오래전에 심장 우회 수술을 받으신 적이 있는데, 이번에 증상이 재발해서 상태가 위급합니다. 최대한 빨리 2차 개흉 수술을 해야 합니다.” 주치의는 방연서 옆에 서 있던 심우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흉강 내 유착이 심해 수술 위험도가 극도로 높습니다. 우리 병원에서는 아무도 이 수술을 감히 집도하지 못합니다.” “현재 국내에서 이 수술을 할 수 있는 분은 진 교수님뿐입니다.” “하지만 진 교수님 진료는 최소 석 달 뒤에나 받을 수 있는데, 환자분은 그때까지 도저히 버티지 못합니다.” 방연서가 절망에 빠진 순간, 의사가 갑자기 심우열에게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심 원장님이 진 교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가장 아끼는 학생이셨죠?” “원장님이 직접 부탁하시면, 교수님께서 개인 시간을 내서라도 날아와 집도해 주실 겁니다.” 방연서가 심우열을 돌아보았다. “제발... 진 교수님께 연락해서 우리 엄마를 살려줘.” 심우열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건 규정에 어긋나.” 방연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심우열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 누워 있는 사람은 우리 엄마야.” 심우열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병원에는 병원의 제도가 있고, 진 교수님에게도 그분만의 스케줄이 있어.” “오늘 내가 너를 위해 예외를 허용하면, 그동안 줄 서서 기다린 다른 환자들은 어떡해? 그건 불공평해.” 방연서는 목이 메어 말했다. “당신이 나한테 공평을 따져? 당신과 이현지가 아니었으면, 우리 엄마가 심장병이 도졌을 것 같아?” 심우열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목소리에는 한층 더 엄격한 기색이 실렸다. “이게 현지랑 무슨 상관이야? 제발 억지 부리지 마.” “그리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원장인 내가 앞장서서 의료 원칙을 어길 수는 없어.” “너도 좀 성숙해져. 매번 감정적으로 굴지 말고.” 방연서는 붉어진 눈으로 그 얼굴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도와주지 않겠다는 거지?” “그래, 이게 내 원칙이니까.” 방연서는 극도의 분노에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좋아, 당신 도움 없이 내가 직접 방법을 찾겠어.” 심우열은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진 교수님을 찾아가는 건 상관없지만, 내 이름은 쓰지 마.” “그리고 어머니가 아프시니 우리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못하시겠네. 하지만 결혼 날짜는 바꿀 수 없어. 내 일정은 이미 다 정해져 있으니까.” 방연서는 분노로 온몸이 떨렸다. 어머니가 지금 그 때문에 생명이 위급한데, 심우열은 어머니의 목숨 구하는 걸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간표 타령이나 하고 있었다. 자신과 어머니가 심우열에게 대체 뭐란 말인가? 주치의가 그 모습을 보고 급히 입을 열었다. “일단 지금 급한 건 IABP를 시술해서 생명을 유지하고 시간을 더 버는 겁니다.” “심 원장님, 환자분 혈압이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IABP 삽입은 원장님보다 더 확실하게 해낼 사람이 없는데...” 방연서는 심우열의 냉정함이 증오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어머니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방연서는 모든 분노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엄마를 살려줘.” 심우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준비해.” ... 중환자실 안, 심우열이 어시스턴트가 건넨 멸균 장갑을 받아 들었다. 바로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심우열은 시술 중에는 모든 의료진의 휴대폰 전원을 꺼야 한다는 철칙을 정해두고 있었다. 심우열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주위의 의료진을 둘러보았다. “누가 휴대폰 안 껐어?” 어시스턴트가 주머니를 만져보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심우열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심 원장님, 원장님 개인 휴대폰인 것 같습니다.” 심우열의 동작이 멈칫했다. 갑작스럽게 수술에 투입되느라 옷을 갈아입는 것도 급해서, 무음으로 바꾸는 걸 깜빡한 것이다. 심우열은 미간을 찌푸리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화면을 스쳐본 순간, 심우열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예전에 윗선에서 긴급 전화가 걸려 와도 환자 곁을 떠나지 않던 심우열이, 곧바로 휴대폰을 들고는 중환자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제5화 중환자실 밖에서 기다리던 방연서는 심우열이 나오자 급히 다가갔다. “왜 나왔어? 우리 엄마는?” “급한 전화가 와서. 잠깐만.” 심우열이 전화를 받자, 이현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심우열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현지야, 울지 마. 내가 지금 갈게!” 전화를 끊은 심우열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방연서가 심우열의 팔을 붙잡았다. “어디 가는 거야?” “현지 쪽에 급한 일이 생겼대. 나 가봐야 해.” “가면 우리 엄마는 어떡하고?” 심우열은 방연서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다. “네 엄마는 의료진이 지켜보고 있잖아. 나 하나 빠진다고 큰일 나지는 않아.” “주치의한테 맡겨. 나 잠깐 다녀올게.” 말을 마친 심우열은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방연서가 뒤쫓았지만, 엘리베이터 문은 눈앞에서 닫혔다. “심우열! 돌아와!” 중환자실 문이 다시 열리더니, 주치의가 나와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심 원장님은요? 아직 IABP도 삽입하지 않았는데!” 방연서는 힘없이 대답했다. “갔어요.” 의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갔다고요? 환자가 언제 심정지가 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 가셨다고요?” “이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평소에는 그렇게 원칙을 중시하시던 분이 오늘은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환자를 이렇게 두고 자리를 뜨시는 건 처음 봅니다.” 방연서는 고개를 들어 올리며, 더 이상 참지 못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주치의 선생님께 맡기라고 했어요. 선생님... 제발 우리 엄마 좀 살려주세요.” 의사는 이를 악물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의사가 들어가는 것을 보며, 방연서는 복도 벽을 따라 조금씩 주저앉았다. 2시간이 지나, 의사가 마침내 문을 열고 나왔다. “IABP 삽입은 성공했습니다. 환자분은 일단 상태가 안정됐습니다. 하지만 일주일 안에 반드시 진 교수님을 모셔 와서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방연서는 붉어진 눈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진 교수님께 연락해 볼게요.” 주치의는 고개를 저었다. “심 원장님도 참... 전화 한 통이면 될 일을, 무슨 원칙을 어긴다고 생각하시는지... 게다가 두 분은 곧 결혼할 사이인데, 도대체 왜 그러시는지...” 방연서는 씁쓸하게 말했다. “결혼 안 해요.” 주치의는 한숨을 쉬었다. “먼저 입원 수속부터 하세요.” “수술비와 이후 중환자실 치료비까지 합쳐 대략 1억 정도 준비하셔야 합니다.” “빨리 입금해 주셔야 병원에서 이후 치료와 약물 처방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1억...’ 방연서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었다. 다행히 방연서와 심우열에게는 공동 통장이 하나 있었다. 방연서는 곧바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햇다. 하지만 통장을 넣어둔 상자를 열어보니, 통장이 사라져 있었다. ‘분명히 여기에 넣어뒀는데, 어떻게 없어진 거지?’ 방연서는 통장이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그때 현관에서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심우열이 슬리퍼로 갈아신으면서 들어왔다. “뭐 찾고 있어?” 방연서는 핏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통장 어디 있어?” 심우열은 넥타이를 풀며 말했다. “현지가 귀국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자금이 좀 부족하대. 급하게 필요하다고 해서 내가 줬어.” 제6화 방연서는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 안에는 2억이 들어 있었다. 원래 두 사람이 함께 모은 돈이었다. 방연서는 통장을 받던 날을 떠올렸다. 심우열이 방연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연서야, 이건 앞으로 우리가 함께 꾸릴 집이야. 이제부터 네가 잘 맡아 줘.” 그런데 이제 심우열은 아무 말도 없이 그 돈을 이현지에게 넘겨준 것이다. 그렇다. 이제 두 사람은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이 통장도 의미가 없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방연서의 돈도 들어 있었다. “네 돈을 누구한테 주든 난 상관없어. 하지만 내 돈 8,000만 원은 돌려줘.” 심우열은 정수기 앞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받아 마셨다. “통장에 있던 2억 전부 현지에게 빌려줬어.” 방연서가 달려들어 심우열이 들고 있던 물컵을 낚아챘다. 컵이 바닥에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났다. 방연서는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채 처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건 내 돈이야! 우리 엄마 목숨을 살릴 돈이라고! 당장 그 여자한테 전화해서 돈 돌려달라고 해!” “오늘 당장 집을 팔아서라도 돈을 마련해. 안 그러면 법원에서 보자고!” 심우열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방연서가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방연서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집과 차는 이미 은행에 담보로 잡혔어.” “통장에 있던 돈까지 합쳐서 10억을 현지에게 줬어.” 방연서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했다. 방연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6년 동안 사랑해 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우리 신혼집까지 담보로 잡았다고?” “이현지는 우리 엄마가 지금 한창 치료를 받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일부러 그런 거야!” 심우열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졌다. “말조심해. 현지의 프로젝트는 걔한테 정말 중요해. 그 돈이 없으면 프로젝트가 무산되고, 몇 년 동안 해온 노력이 전부 물거품이 된다고.” “현지가 혼자 프로젝트를 해나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너 좀 그렇게 이기적으로 굴지 않으면 안 돼?” “네 어머니 병은 나도 이해해. 하지만 일단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빌려보든가. 아니면 네 엄마가 사는 그 낡은 집이라도 팔아. 어떻게든 방법은 있을 거야.” “현지 자금 사정이 풀리면 당연히 갚아줄 테니까.” 짝! 방연서가 심우열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심우열, 네가 인간이야?” 방연서가 문밖을 가리켰다. “당장 병원으로 가. 원장이라는 네 권한으로 우리 엄마 수술비를 보증해서 긴급 지원을 신청해.” “안 그러면 이현지까지 함께 고소할 거야!” 심우열은 손등으로 입가에 맺힌 피를 닦아냈다. “불가능해.” “병원에는 명확한 규정이 있어. 누구에게도 개인적으로 거액의 미납 진료비를 승인해 줄 수 없어. 내가 너한테 예외를 허용하는 순간, 제도 자체가 무너지는 거야.” “하지만 내가 민정 구제 지원을 신청해 줄 수는 있어. 규정대로 절차를 밟으면 15일에서 30일 정도면 돈이 나올 거야.” 방연서는 이를 악물었다. 입안에서는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30일? 엄마 수술은 7일 안에 해야 해!’ 심우열은 지금 자신의 엄마를 죽게 만들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방연서는 가슴이 심하게 들썩거렸다. 극심한 어지러움에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방연서는 조수석에 누워 있었다. 심우열이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있었다. “열이 많이 나. 비를 맞아서 그런 것 같아. 병원에 데려다줄게.” “수술비는 너무 걱정하지 마.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내가 다시 방법을 찾아볼게.” 방연서는 열 때문에 온몸이 쑤시고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방연서는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소리 없이 시트 위로 떨어졌다. “심우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도 알잖아... 나한테는 엄마밖에 없는 거...” 심우열은 한숨을 쉬며 손을 뻗어 방연서의 이마를 만지려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리면서 피했다. “미안해. 하지만 현지가 전화로 그렇게 서럽게 우는데, 정말 외면할 수가 없었어.” 방연서는 절망 속에 눈을 감았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그 구멍으로 차가운 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는 듯했다. 심우열에게는 언제나 이현지가 가장 중요했다. 방연서는 이제 다툴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방연서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방연서는 숨이 막힐 듯한 더위에 잠에서 깼다. 운전석은 비어 있었고, 심우열은 보이지 않았다. 차 안은 찜통처럼 뜨거웠다. 방연서는 크게 숨을 들이쉬면서, 간신히 몸을 일으켜서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방연서는 차 안에 갇혀 있었다. 제7화 한여름의 대낮, 차 안 전체가 마치 찜통 같았다. 시트의 가죽 표면은 닿기만 해도 화상을 입을 듯 뜨거웠고, 피부에 닿을 때마다 따가운 통증이 밀려왔다. 방연서는 손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아 심우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끝내 아무도 받지 않았다. 차 안의 온도는 계속해서 치솟았고, 방연서의 시야는 흐려지기 시작했으며, 머릿속이 윙윙 울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여기서 죽을지도 몰랐다. 방연서는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려 좌석의 머리 받침을 힘껏 뽑아냈다. 그리고는 그 밑부분의 금속 끝으로 차창 유리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내리쳤다. 쾅! 쾅! 쾅! 한 번, 또 한 번. 방연서는 남은 힘을 끌어모아서 같은 자리를 향해 내리찍었다. 쾅! 차창 유리가 마침내 산산조각 났다. 서늘한 바람이 차 안으로 밀려 들어오자, 방연서의 흐릿했던 의식이 겨우 돌아왔다. 방연서는 차창 밖으로 기어 나오듯 몸을 빼낸 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한참이 지나서야, 방연서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제야 방연서는 자신이 산길 중턱에 세워진 차 안에 갇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멀지 않은 비탈 위에서는 야외 캠핑 행사가 한창이었다. 방연서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심우열이 한 손으로 이현지에게 양산을 씌워 준 채, 다른 손으로는 이현지에게 다정하게 물을 먹여주고 있는 것을. 이현지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무슨 말을 했는지, 평소에는 좀처럼 웃지 않던 심우열마저 입꼬리를 올렸다. 방연서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모든 것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다. 시선을 거둔 방연서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다리를 끌며 한 걸음씩 산에서 내려와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심우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왜 말도 없이 갔어? 그리고 차창은 어떻게 된 거야?] 방연서는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넌 이현지에게 양산을 들어주고 물을 먹여주려고, 나를 차에 가둬놨어.” “내가 그 안에서 거의 죽을 뻔한 거 알아?”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안해. 차에서 내릴 때 너무 급해서, 차 안이 그렇게 뜨거워질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현지가 행사를 하더라고. 어린애가 한여름에 그렇게 많은 짐을 옮기는데, 내가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혹시 더위 먹고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해?] 방연서는 심우열의 당연하다는 말투를 들으며, 문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심우열은 이현지가 더위 먹을까 봐 걱정하면서, 방연서가 아직 고열에 시달린 채 밀폐된 차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 방금 응급실에서 검사 받았어.” “의사가 열사병이래. 30분만 늦었어도 돌이킬 수 없는 뇌 손상이 왔을 거라고.” 순간 수화기 너머 심우열의 숨소리가 멎었다. [연서야...] 하지만 방연서는 심우열의 말을 더 듣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후 방연서는 남은 정신을 억지로 가다듬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엄마 옛집을 내놔 줘. 최대한 빨리. 돈이 급해.” 이어서 방연서는 연락처를 뒤져, 진혁수를 알고 있을 만한 사람들에게 모조리 전화를 돌렸다. 방연서는 어떻게 해서든 박수정의 수술을 위해 진혁수를 모셔와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심우열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방연서의 창백한 얼굴을 본 심우열의 눈에 미안함이 스쳤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사과할게.” 방연서가 심우열을 바라보았다. “사과 필요 없어.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끝났어. 빨리 내 돈 8000만 원 돌려줘.” 심우열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눈가에 서린 불쾌함을 눌렀다. “너 꼭 이런 때에 나한테 화풀이를 해야겠어?” “제발 그만 좀 해. 꼭 어린애처럼 현지 때문에 괜한 질투나 하고.” 방연서는 반박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손등에 꽂힌 주삿바늘을 확 뽑아버린 방연서는, 이불을 걷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심우열이 재빨리 방연서를 붙들었다. “어디 가려고? 네 상태로는 최소 일주일은 입원해서 지켜봐야 해!” 방연서는 자신의 어깨를 짚은 심우열의 손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너만 아니었으면 나는 열사병에 걸리지도 않았어. 너랑 이현지만 아니었으면, 우리 엄마도 지금 중환자실에 누워 있지 않았고.” 심우열의 얼굴이 굳어졌다. “네 어머니가 아픈 건 우연한 일이야. 왜 자꾸 현지한테 억지를 부려? 너 제발 말이 되는 소리 좀 해.” 방연서는 비웃음을 지었다. “좋아, 그럼 지금 당장 이현지한테 8000만 원을 돌려달라고 하든가. 아니면 진 교수를 불러서 우리 엄마 수술을 맡겨주든가.” “둘 중 하나라도 할 수 있어?” 심우열은 입술을 깨물었다. “말했잖아,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방연서는 냉소를 흘렸다. “그럼 비켜.” 방연서는 심우열을 힘껏 밀쳐내고 병실을 나섰다. 그 후 며칠 동안, 방연서는 매일 바빴다. 진혁수의 행방을 찾아 사방으로 뛰어다니면서 중환자실에 누운 어머니를 돌봤다. 친척과 친구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려 결혼식 취소를 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심우열도 바빴다. 병원 일을 처리하는 한편, 이현지의 2억짜리 프로젝트를 추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머니가 입원한 지 5일째 되던 저녁, 방연서는 친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연서야, 알아냈어!] [진 교수님이 우리 지역에 오셨어. 오늘 밤 자선 행사에 참석하신대!] 제8화 방연서는 초대장이 없다는 이유로 문 앞에서 가로막혔다. 하지만 방연서는 연회장 안의 심우열을 보았다. 심우열의 팔짱을 끼고 있는 사람은 이현지였다. 심우열은 이현지를 데리고, 진혁수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방연서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지난 6년이 그저 거대한 웃음거리처럼 느껴졌다. ... 드디어 파티가 끝났다. 방연서는 황급히 달려가 진혁수의 앞을 가로막고,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잠시 후, 진혁수는 방연서를 알아보았다. “당신... 우열이 약혼녀였군. 1년 전에 본 적 있지.” “그 녀석,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방금 안에서는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나한테 같은 학교 후배라는 그 여자만 소개해 주고.” 방연서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 사람은 제가 교수님께 자기 얘기를 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러니 제 어머니 치료는 그 사람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진 교수님, 제 어머니만 살려주실 수 있다면 뭐든 할게요.” 진혁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 젊은 놈이 왜 그렇게 고지식한지. 사람 목숨이 오가는 판국에는 융통성도 좀 부려야지.” “내일 오전에 마침 시간이 비어 있으니, 어머니 수술을 해드릴 수 있겠네.” 방연서는 연신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고, 진혁수와 내일 아침 8시에 병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병원에 돌아오자,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옛집이 1억 4,000만 원에 팔렸다는 소식이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그제야 내려앉았다. 이제 어머니를 살릴 수 있다. 그런데 다음 날 8시, 진혁수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방연서는 몇 번이고 진혁수의 전화를 걸어봤지만,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주치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진 교수님은 어디 계세요? 환자분 상태가 또 나빠졌어요.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늦어요!” 바로 그때, 지나가던 한 간호사가 입을 열었다. “진 교수님 봤어요.” 방연서가 고개를 홱 돌렸다. “어디서요?” “심 원장님이 데려가셨어요.” 방연서는 곧바로 심우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 아무도 받지 않았다. 방연서는 곧바로 병원을 한 층 한 층 뒤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특수 검사실 밖에서 유리 너머로 진혁수의 모습을 발견했다. 방연서가 막 들어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 심우열은 방연서를 복도 끝까지 끌고 갔다. 방연서는 힘껏 심우열의 손아귀를 뿌리치며,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우리 엄마가 진 교수님을 기다리며 죽어가고 있는데, 네가 무슨 권리로 그분을 데려간 거야?” “현지가 가슴이 불편하다고 해서 정밀 검사를 해보려고.” 방연서는 분노로 온몸이 떨렸다. “병원에 의사가 그렇게 많은데 그걸로 부족해? 진 교수님은 우리 엄마 수술을 위해 내가 모셔 온 분이야!” “진 교수님은 국내 심장내과 최고 권위자니까, 그분에게 현지를 직접 진찰받아야 내가 안심이 돼.” 심우열은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조금만 기다려.” “어차피 이렇게 며칠이나 기다렸잖아. 몇 시간 더 기다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방연서는 눈앞의 이 남자를 바라보며,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넌 원칙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우리 엄마를 위해서는 규정을 못 어기겠다면서, 지금 이건 뭐야?” “특별한 경우니까 예외적으로 처리하는 거야.” 심우열이 담담하게 내뱉었다. 말을 마치고, 심우열은 병원 경비원들을 불렀다. “저 사람 잘 지켜봐. 진 교수님 진료를 방해하러 가지 못하게 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너희가 책임져.” 경비원들이 곧바로 다가와 방연서의 팔을 붙들었다. “심우열! 이 나쁜 놈! 놔! 우리 엄마는 더 기다릴 수 없어.” “심우열... 제발...” 방연서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절망 속에 울부짖었다. 심우열은 그 절박한 울부짖음에 가슴이 철렁했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특수 검사실 안, 진혁수는 심전도를 보며 말했다. “이 아가씨는 별문제 없어. 우열아, 네가 너무 걱정한 모양이야.” 이현지는 검사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가슴이 정말 아프고 숨도 잘 안 쉬어져요...” 심우열이 다가가 이현지를 부축해 내렸다. “선생님, 좀 더 정밀하게 검사해 주세요. 그래야 제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혁수는 이상하다는 듯 심우열을 쳐다보았다. “너 그 약혼녀랑 결혼할 거지?” 심우열은 담담하게 웃으며 표정은 태연했다. “당연하죠. 연서랑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제 아내는 평생 그 사람 하나뿐입니다.” 이현지는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을 꽉 주고,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난 네 약혼녀와 8시에 수술하기로 약속했는데, 왜 시간이 바뀐 거지?” 심우열이 해명했다. “먼저 다른 수술 전 검사를 받고 있어요. 결과가 다 나오면 선생님께서 함께 보시기도 편할 겁니다.” “마침 그 시간에 현지 검사를 좀 부탁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또 4시간이 흘렀다. 이현지는 모든 검사를 마쳤고, 결과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심우열은 그제야 진혁수와 함께 박수정이 있는 중환자실로 향했다. 하지만 중환자실 안의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방연서도, 박수정도 보이지 않았다. 심우열이 의아해하는 순간, 박수정의 주치의가 들어왔다. 심우열이 급히 물었다. “환자는 어디 있어?” 주치의는 심우열을 바라보며, 복잡한 눈빛으로 말했다. “환자분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2시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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